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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May 26. 2024

이제부터 마피아 게임을 시작하지

D+1(2) │서로를 알아 간다는 것

  마니또 상대는 오늘 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공개하기로 했다. 파티라기보단 한 잔 하는 저녁 식사일 텐데, 내일부터 이식쿨 호수로 향하는 동선에 맞춰 비슈케크 외곽에 여행사 소유 2층 독채에서 한다고 했다. 우리를 실은 흰색 카니발 네 대가 일렬로 도심을 빠져나갔다. 가로등 없이 굽은 비포장길 옆으로 불 켜진 집들이 드문 드문 스쳐갔다. 굴뚝마다 푹 짜여 나온 희뿌연 연기가 검푸른 하늘의 명도를 군데군데 높였고 그때마다 멀리 설산의 윤곽이 또렸해졌다 흐려졌다.

  ‘음~ 여긴 용인 오포리 같구먼.’


  2미터는 훌쩍 넘는 초록 철문이 열리고 카니발 네 대가 마당에 들어섰다. 자기를 비숑 정도로 잘못 아는 (견)종체불명 흑곰(처럼 생긴 대형견)이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일단 여기서 저녁 겸 크리스마스 파티 하시고, 여자분들만 근처 호텔로 옮기실 거예요. 짐은 남자분들 것만 내리시면 돼요.”

  이대표님이 현관문을 열자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손잡이와 탁 트인 거실 천장 샹들리에에 나슨히 걸린 초록 빨강 모루가 반짝였다. 친절하고 센스 있지만 미적감각은 기대할 수 없어 보였던 사십 대 남자, 여행사 대표님과 현지인 가이드분들이 스무 시간을 날아온 손님들의 연말파티를 위해 저 높은 곳에 낑낑대며 꾸몄을 모습이 상상되자, 알라투 광장 대형트리의 장엄한 조명은 못 채운 따뜻함이 반짝였다. 어설퍼서 귀여웠고, 귀여워서 예뻐 보였다. 역시 사람이든 뭐든 '귀엽다~' 싶으면 게임오버라니까.


  타탁 타탁 타는 거실 벽난로 앞을 왔다 갔다, 1,2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둘러보니 <하트시그널>을 찍기 딱 좋은 숙소였다. 심지어 남자 멤버 하나 둘이 캐리어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1회 차 입소씬!

  "어머, 상철님! 반가워요."

  "정숙님이시죠? 옥순님은 없나요?"

  장소는 <하트시그널>인데 우리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나는 솔로> 상철, 영수, 정숙, 순자로 서로를 불렀다. 상황극 티키타카가 이렇게나 잘 맞다니. 이미 서로 본명도 알겠다, 앞으로 '솔로나라' 밖, 아니 키르기스스탄에서 여정이 꽤나 유쾌할 것 같아 별 것 아닌 농담에도 히죽댔다.


  "얘들아, 우리도 그냥 이 집에서 자는 게 어때?"

  2층에 더블 베드룸 세 개, 1층 거실에 베드 두 개. 화장실도 위아래 하나씩밖에 없어 여행사는 여자들이 불편할 것 같다며 근처 호텔을 따로 잡아뒀다. 그런데 술 먹다 끊고 일어나는 것도 애매할 테고, 취했는데 분위기상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피곤할 테고, 나는 한창인데 눈 거물거물한 친구 눈치 봐야 하는 것도 불편할 테고, 그런 우리를 맨 정신으로 기다리는 가이드에게 미안할 테고, 그 마음에 양껏 못 놀 것도 아쉬울 테니! 하룻밤 정도야 그냥 여기서 끼여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의 온기가 좋았다. 신발 벗고 내디딘 마룻바닥의 뜨끈함! 무자비한 건조를 동반한 호텔방의 공중 난방과는 다른 훈기였다. 왜,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면 헛기침과 콧바람 한 번에 목구멍과 콧구멍이 부싯돌 바짝 그은 마른 지푸라기 마냥 바싹 타들어 가지 않나? 전날 밤 쓰고 널어 둔 수건이 밤새 파피루스보다 빳빳하게 말라 버리는 호텔방의 마이너스 156퍼센트 습도는 정처 없는 여행객의 존재성을 허공 높이 날려 버리는 촉매 같다. 근데 이 <하트시그널> 숙소에 적절히 분포된 포근한 습도는 이방인의 들뜬 긴장감을 여행객의 설렘으로 치환시켰다. 그래서였나? 나도 모르게 '이 숙소'가 아닌 '이 집'이라고 말하고, 이제야 성(性)이나 '님'자 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진 일행들에게 대차게 숙소 변경을 제안했다. 마침 2층 복도에 모여 있던 여자 멤버들이 동의하자마자 솔이와 비비가 계단 난간에 기대 이대표님에 "우리도 여기서 잘게요."라고 했다. 짐 나르는 사람들을 위해 아직도 현관에서 인간 도어 스토퍼 역할을 하고 있던 그는 "좀 불편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갸우뚱하더니 이내 가이드들에게 모든 짐을 다 내리라고 했다.


  더블베드랑 좁은 소파 사이로 테트리스처럼 오늘의 룸메이트 소희, 비비, 나의 캐리어 네 개를 펼쳤다.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1층 주방으로 내려가니 이대표님과 그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는 친형님이 부르스타와 불판을 세팅하고 짜장떡볶이를 만들고 있었다. 한식당에서 삼겹살과 목살을 사며 받아 온 김치, 마늘종 장아찌, 멸치볶음을 12인용 식탁에 맞게 내가 나눠 담으니 유일한 유부남 멤버 정호(그는 여행사 콘텐츠와 플랫폼 기획자로 동행했다)가 도왔다. 현지의 테라급이라는 맥주와 참이슬 빨간 뚜껑급이라는 파란색 V로고의 보드카를 한두 잔 더할수록 얼굴 홍조와 웃음 데시벨이 조금씩 올라갔다. 문뜩 여기가 키르기스스탄인지 가평인지 헷갈렸다. 이 정도 닮았으면 튀르키예가 아니라 키르기스스탄이 형제 나라 아닐까?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드디어 마니또 공개식을 거행하기 위해 거실로 옮겼다. 다들 술과 과자, 낮에 시장에서 몰래 혹은 대놓고 선물로 산 양모 양말과 전통 문양 슬리퍼, 고산지대 채취 꿀을 함유한 마스크팩을 챙겨 왔다. A가 내 마니또는 B였다고 선물을 주면 B가 내 마니또는 C였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증정식이 이어졌는데 가이드 포함 열네 명의 멤버 중 열 명 넘게 발표가 되도록 내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니또의 하루도 어색했는데 심지어 엔딩을 장식해야 하다니. 제발 누구라도 빨리 내 이름을 불러줘!


  "잠깐만, 그럼 아름이랑 비비만 남은 건가? 서로 마니또였네!"

  맏형 훈이 오빠가 상황 정리를 하자 맞은편의 비비가 폴짝 일어났다.

  "나 언니일 줄 알았어! 언니 티 엄청났어요. 제 선물은 아까 언니가 카페에서 귀엽다고 했던 이 문어 키링입니당~!"

  마니또 발표의 엔딩을 장식하게 된 것보다, 나름 몰래한 행동이 다 티가 났다는 것보다, 그렇게 챙긴 비비의 마니또가 실은 나였다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비비가 준비한 인형이었다. 마니또 선물이 마땅찮았던 참에 카페에서 손뜨개질로 만든 핑크색 문어 인형을 발견하고 테라스에 앉아있던 비비를 굳이 불러와 돈을 빌려주는 척 미리 사줬던 그것이 다시 내게 돌아오다니! 심지어 난 진심으로 인형을 좋아하지 않아!!


  "비비야. 나 이거 너 선물로 줄려고 돈 빌려주는 척한 거야. 이거 너 해."

  "언니, 저 인형 안 좋아해요. 언니 해요."

  "나도 인형 안 좋아해. 너 해."


  서로 집 앞에 쌀 가마니 옮겨 놓는 의 좋은 형제도 아니고, 손바닥보다 작은 인형을 미루는 모습에 멤버들은 "둘 다 T라서 저런 말에 상처도 안 받아." "귀엽다면서 서로 안 하려고 해." 하며 당황한 우리를 보고 엄청 웃어댔다. 아니, 요즘 MZ들은 가방에 인형 다는 게 유행이라며? 그리고 너 파스텔톤으로 옷도 귀엽게 입으면서 너처럼 깜찍한 인형은 왜 안 좋아해? 역시 서로를 안다고 말하기엔 아직은 많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비비보다 '순자', 아름보다 '영숙' 정도의 단계.



  "이럴 때 마피아 게임해야 해! 서로 이 정도 알 때 하면 더 어렵고 재밌잖아?"

  솔이의 게임 제안에 마니또들은 일순간 마피아 마을로 입성했다. 솔이와 비비가 룰을 설명하자, 우기오빠는 "난 이런 거 기 빨려. 안 해." 하고 벽난로 쪽 의자로 빠져 잭코크를 홀짝댔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엎드려 양손으로 바닥을 두구두구 두드리는 사이 사회자 솔이가 마피아 셋, 의사 하나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의사는 매 라운드마다 한 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즉, 마피아가 죽인 시민도 영민한 의사라면 살릴 수 있는 것!)의 뒷덜미를 콕콕 눌렀다. 아침이 밝았고, 우기오빠와 솔이를 뺀 아홉 명은 서로를 탐색했다. 하지만 평소 표정과 습관도 모르니 뭐가 단서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마피아로 의심되는 사람을 셋씩 지목하라는 솔이의 지령에 일단 돌아가며 말은 하는데, 이 게임 자체를 이해 못 한 듯한 영준오빠 (현지 여행사 컨설턴트), 아직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다는 소희 (필라테스 세션을 진행할 강사),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갑자기 말이 많아진 수빈 (로드트립 플랫폼 대표). 그런 수빈이를 지목한, 한 달 전 그를 인터뷰한 여행 기자 다이와 수빈이의 지인 훈이오빠와 상우. 마피아 마을에서 십 년째 미용실을 운영 중이라는 상황극 몰입러 비비 (수빈이네 회사에 출근한 지 일주일 된 여행 크리에이터). 그런 비비의 상황극에 당황한 정호까지. 이제 내 차례였다.


  비행 중 읽은 책이 떠올랐다. 신형철 평론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성격은 곧 운명'이어서, '특정 성격이 특정 상황에 던져졌을 때 특정한 선택을 하는 것이 이야기를 만든다'고 했다. 일단 내가 안다고 할 만한 성격은 여덟 명의 마피아 후보 중 고작 둘, 상우와 수빈뿐이었다. 오히려 여행 전 날 공항 가까운 우리 집에서 잔다고 다른 일행보단 하루는 시간을 더 보낸 사회자 솔이를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난 누구 같다고 이름을 밝히진 않을게. 근데 내가 솔이라면 이 게임판의 재미를 위해서 모두 공통적으로 잘 아는 캐릭터 두 명 정도,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은 사람 하나, 이렇게 마피아로 찍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꽤나 예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멤버들이 바로 동조를 했다. (그럼 나도 나름 믿을 만한 이미지인가?) 그리고 전자는 이 여행을 이끌고 있는 수빈이와 비비, 후자는 현지 여행사 쪽인 영준오빠와 소희로 급격히 좁혀졌다. 수빈이와 비비는 더 말이 많아졌고, 영준오빠와 소희는 더 말이 없어졌다. 마피아 게임 국룰대로 말 많은 순서로 시험대에 올렸고, 최후 변론을 했고, 과반수가 넘는 엄지 다운으로 수빈 마피아가 색출됐다. 그대로 갔다면 시민의 승리로 끝났겠지만, 소싯적 의사가 없는 버전의 마피아 게임만 꽤 해 본 07학번 정호가 의사가 되는 바람에, 본인을 마피아로 알고 선량한 시민 몇 명을 떠나보냈다. 당황한 그는 말이 많아졌다 죽었고, 결국 마피아 비비와 소희의 승리로 끝났다.


  "정호오빠가 이렇게 못할지 몰랐지! 오빠가 만든 영상 보면 엄청 치밀하고 멋있는 사람 같단 말이야."

  역시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영상물로로 성향이 파악되는지, 솔이는 마피아 마을 중역에 정호를 정했던 이유와 그러다 맞이한 반전의 결말에 대해 유쾌한 코멘터리했다.


  7박 9일 여행의 마지막 밤 술자리에서 첫날의 마피아 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면 그땐 고작 서로의 MBTI밖에 몰랐다고. 열여섯 가지 MBTI안에서도 지표별 퍼센트와 조합에 따라 캐릭터가 천차만별일텐데.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만 봐도 우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는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고, 누구는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섰다. 루틴이라며 앱으로 짧은 영어 공부를 하는 친구도 있었고, 침대 속에서 예능 유튜브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니, 첫인상의 예고와 그대로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고했던 장르는 같지만 그 농도가 훨씬 짙거나, 전혀 상상도 못했던 장르 전환이거나. 디렉터스 컷으로 빼놓은 매력들이 더 많았다. 덕분에 때론 나 스스로도 타인처럼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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