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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26. 2024

단체 패키지와 로드트립 크루, 그 사이

D+1 (1) |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투어

  현지 시간 새벽 한 시.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새벽 네 시에야 체크인 하고, 화장 지우고, 뜨끈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인천 송도 우리 집에서 도어 투 도어 무려 스무 시간만! 테르스케이 산맥 어디쯤 만년설을 뒹굴러 왔지만 일단은 비슈케크 다마스호텔 1107호의 바스락대는 하얀 침구에 좀 널브러지자. 하, 내일은 뭐 한다고 했더라? 단톡방 공지에 박힌 링크를 열었다. 조식, 필라테스, 중식, 알라토 광장, 호텔 체크인, 크리스마스 디너파티? 그러고 보니 내일이, 아니 새벽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구나! 해외에서 크리스마스라니, 우동 먹으러 일본 가던 구준표가 된 기분이었다.


[ 다들 오늘 고생하셨어요!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하실 것 같아 내일 아침 필라테스는 취소할게요.

  여유 있게 오전 시간 보내시고 짐 다 싸서 11시까지 로비에서 봐요.]


  현지에서 13년째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대표님이 카톡을 보냈다. 사전 모임 때 멤버 대부분 MBTI가 P로 끝나는 걸 보곤 상황에 맞게 조율할 테니 걱정 말라던 그는 첫날부터 신뢰의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평균 연령 35.4세 '크루'가 떠나는 '오프로드 트립'이라지만, 쉽게 말하면 그냥 '단체 관광객'의 '패키지여행'이다. 낯선 사람들과 정해진 대로 움직이다 이상한 데 들려 옥팔찌나 가죽으로 둔갑한 비닐 지갑을 강매당할까 지레 질색하던 그 여행말이다. 그런데 왠걸, 평소 숙소 하나만 덜렁 잡고 가는 P 80퍼센트 내게 은근 잘 맞았다. 역시 <약은 약사에게, 여행은 여행사에게>.



여유있는 아침 일정 덕에 K와 산책을 다녀왔다. 대부분 중고차를 고쳐 타다 보니 매력적인 무드의 클래식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와이파이가 모스부호처럼 끊기는 해외에서 (계획성도 없는데 심지어) 길치인 내가 우버 기사님과 서로 서툰 영어로 찾아 헤멜 필요가 없었다. 대신 매일 아침이면 신형 카니발 네 대가 숙소 앞에 딱 대기하고 있었다. 과잉 옵션 멀미가 있어 창고형 대형 마트보다 동네 슈퍼를 선호하는 내게 누구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 호수, 이식쿨 남단을 고작 5일 만에 100배 즐길 루트'를 직접 짜라고 부담 주지 않았다. 남들 다 가봐서 따라가야 할 곳과 구글도 몰라서 먼저 가야 할 곳을 맥심 모카 골드의 커피, 프림, 설탕 황금비율로 여행사가 기가 막히게 타놨으니까. 난 그저 도톰한 니트 카디건 차림으로 해발 774미터 비슈케크를 돌다, "도착했습니다!" 소리에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고 해발 4,000미터 만년설을 뛰어다니기만 하면 됐다. 아주 따끈 달짝지근한 게 내 입맛이었다.


  게다가 넓은 땅 덩어리에 우리 밖에 없으니 여행사 로고 박힌 깃발 뒤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됐고, 함께하는 친구들도 백화점 5층에서 파는 아웃도어보다 지하 2층에서 볼 법한 고프코어룩을 입고 드론을 날리니 (아! 물론, 나는 보조 배터리를 붙인 아이폰 11프로를 쥐고 있었지만), 전형적인 단체 패키지여행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7박 9일 중 첫날과 마지막 하루 반이나 도시에서 보낸다는 게 아쉬웠다. 서서히 고산에 적응할 수 있게 짰다는데, 매일 지하 2층 주차장에서 24층 집까지 걸어 올라오는 내 체력을 아셨다면 걱정 안 해주셔도 됐을 텐데... 여행지와 일상의 시간은 온도가 달라서, 사무실에선 다 녹은 치즈처럼 축축 늘어지던 시간도, 여행 중에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탱탱 쫀득하게 응결돼버린다. 그래서 더 아까웠다. 한 시라도 빨리 자연에 뛰어들어야 하강하는 시간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둘텐데. 하지만 안락한 패키지여행에 이 정도 아쉬움쯤은 감수해야지. 그리고 사실 겨우 지상 24층 체력으로 해발 4,000미터를 비빌 것은 아니니까.


마라톤 대회로 북적한 알라토 광장에서 솜사탕을 팔고 있던 할아버지. 달콤함은 만국공통 행복의 맛이구나.


  타협의 첫날은 여행보단 주말 어느 하루 같았다. 상우가 보내줬던 영상 첫 씬, 대형 트리가 들어 선 알라토 광장(Ala-too Square)은 구면이라 그나마 반가웠다. 광장을 중심으로 대통령궁과 시청, 국회의사당, 국립 역사박물관이 모여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 말을 탄 건국 영웅 마나스 장군 동상은 관광객이 목부터 허리까지 다 젖혀야 한눈에 들어올 만큼 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 옆으론 붉은 키르기스스탄 국기가 위엄 있게 펄럭였고, 맞은편 나지막한 건물들 너머 눈 덮인 산맥이 병풍처럼 서있었다. 흐린 중천에 걸린 태양의 역광까지. 이 나라의 장엄한 미장센같았다. 하지만 감격적이진 않았다. 그냥 세종대로사거리에 서 있는 느낌.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너머 보이는 청와대와 북악산 일렬 뷰, 딱 그 시점이었다.



설화에 의하면 키가 4미터라는 마나스 장군, 중앙아시아나 동북아시아나 히어로에 대한 선조들의 MSG가 좀 과한 편이다.


  정각이 되자 국기봉을 지키는 군인들의 교대식이 시작됐다. 광장 저 멀리서부터 뒤가 깊게 트인 청록색 롱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회색 털모자를 쓴 군인 셋이 삼각대형으로 척척 걸어왔다. 흰 장갑을 끼고 총을 바짝 세워 들고 있었다. 그들은 무릎 관절이 없는 것처럼 다리를 90도로 뻗어 차올렸고, 그때마다 햇빛과 사람들의 셔터에 검정 롱부츠가 반짝였다. 그런데 이것도 (그들의 훈련 노고엔 미안하지만) 그냥 사직로에서 보던 헌병과 비슷했다.


  평균 월급 30만 원인 나라에서 1만 5천 원짜리 수제 햄버거를 팔던 <SB버거>는 서래마을 <브루클린 더버거 조인트>에 육박하게 맛있었다. 즉, 강남의 맛이었다. 에어팟 맥스를 낀 외국인이 맥북을 두들기고 멋쟁이 언니들이 수다 떨던 <애비뉴 카페>는 딱 도산공원 어디를 닮았다. 비슈케크 최대 전통시장 오쉬 바자르(Osh Bazaar)가 조금 새로웠는데, 그래서 제주공항 옆 동문재래시장 같았다.

  

매 시간 정각마다 이뤄지는 국기봉 수호병 교대식, 칼각을 위한 훈련 노고에 박수를!!


  낯선 거라곤 자동차 배기통에 들어갔다 나온 것 마냥 온몸에 밴 매연 냄새와 대학 1학년 이후 처음 해본 마니또정도 였다.



  오후 다섯 시, 알라토 광장을 덮은 은하수 조명이 켜지자 도심의 어둠과 심드렁했던 내 표정이 "와"하는 탄성과 함께 걷혔다. 오늘은 흔한 주말이 아닌 만인을 향한 축복과 사랑 가득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는 것을, 익숙한 풍경에 무감한 줄 알았지만 여행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발이 3센티미터는 떠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띄엄띄엄 서 있던 우린 일제히 트리 바로 아래 펜스까지 달려갔다.

  "잠깐만, 비비야."

  오른쪽 귀 위로 꽂은 양털 헤어핀과 비슷한 소재의 미니 스커트를 입고, 롱 어그부츠를 신은 비비의 하얀 패딩 모자가 뒤집어져 있었다. 얼른 달려가 고쳐줬다.

"비비야, 너 카메라 줘 봐! 여기 서 봐! 비비야! 너무 이쁘다."

  그녀의 카메라로 '인스타각' 사진을 연사로 찍어댔다. 그렇다, 내 마니또는 최연소 멤버 (나랑 딱 열 살 차이) 비비이고, 나는 여자 중 최연장자였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7년 만에 마니또를 했다.



대형트리 베들레헴의 별에서 펼쳐 나온 은하수 조명이 알라투 광장을 덮자 배경도 국적도 나이도 다른 모두가 일제히 천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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