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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16. 2024

KC 910편, 한국인은 딱 열하나

D-DAY 이륙, 환승, 착륙


  키르기스스탄은 코로나 종식 후 세 번째 해외였다. 같은 해 4월 출장으로 갔던 도쿄, 6월 친구들과 놀러 갔던 세부는 공항만 인터내셔널이지, 기내는 제주행과 다를 바 없었다.



  "알마티행 아스타나 항공 KC 910 탑승을 시작합니다."


  안내방송에 따라 휴대전화 충전기 콘센트를 뽑고 상우를 앞세워 45번 게이트로 갔다. 앞으로 7박 9일을 함께 할 (2주 전 사전 모임 때 한두 시간 본 게 전부 인) 열 명의 일행도 모였다. 게이트 오픈이 예정보다 늦어졌다. 옆에 둔 20리터 캐리어 손잡이를 돌려 가슴팍에 끌어안고 몸체에 올라앉았다. 보딩라인에 선 뒤통수들 사이로 입구 쪽 분주한 승무원을 빼꼼 봤다, 통창너머 우리가 탈 비행기로 시선을 돌렸다. 기약 없는 지연, 어색한 일행, 둘 곳 없는 눈동자. 애먼 볼바람만 넣었다 뺐다 하는데, 짙은 회색 비니를 눌러쓴 190센티미터쯤의 이방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외국인 으레의 눈인사가 아닌 '근데 너네 여기 왜 가?' 하듯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오전 11시, 인천공항 제1 터미널 게이트 45에 한국인은 나 포함 딱 열한 명, 우리뿐이었다. 도쿄, 세부 출국 때는 무감했던 붕 뜬 공항 냄새가 순간 온몸을 밀어 올렸다. 생경한 곳으로의 여행이 실감되자 왈칵 쏟아진 긴장감. 그것도 적당해야 설렘이지, 나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카자흐스탄 알마티행 KC910편. 일곱 시간 반의 비행 후 또 버스로 네다섯 시간 이동하여 도보로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는 여정이었다. (Photo by 솔)



  중앙 통로 양쪽으로 A·B·C, H·I·J, 세 자리씩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비행기였지만 SF영화 우주선 같은 결백한 푸른 조명 덕에 꽤 쾌적해 보였다. 내 자리는 통로 측 42H. 42I엔 그나마 사전 모임 이후 종종 인스타그램 DM으로 이야기를 나눈 솔이가 앉았다. 창가석 42J엔 투명한 피부에 사뿐한 커스터드색 단발머리 외국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 러시아어인지 카자흐어인지 알 수 없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끝나고 앞 좌석에 붙은 모니터에서 기내 안전 비디오가 나왔다.


  독수리 한 마리가 망망대해를 지나 초원 위 한 마을로 날아들자 전통복식의 사람들이 유르트(중앙아시아의 전통 가옥으로 몽골의 게르와 닮았다) 앞으로 달려 나와 단단히 잠긴 거대 안전벨트로 줄다리기를 했다. 화면이 전환되고, 설산을 오르던 케이블카 천장에서 기내 산소호흡기가 떨어졌다. 한 아이가 자연스럽게 산소호흡기를 차고 내려다본 바다엔, 나무 카누에 앉은 스튜어디어스가 엉덩이 밑에서 노란 구명조끼를 꺼내 어깨에 걸치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참신한 로컬리제이션 콘텐츠라니! 여기서 '부산 엑스포 2030' 유치 영상을 만들었음 사우디는 그냥 이겼겠다. 아무튼 올해 한국에서 마지막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이걸로! 업로드가 되자마자 친구에게서 DM이 왔다.



아스타나 항공의 기내 안전 비디오. 처음엔 "이게 뭐야?" 하다가 "이거 찍어야겠다" 하느라 두 번의 재생 모두 집중해서  봤으니 그들의 기획의도는 성공이다.



  [아스타나 탔구나! 착륙할 때 사람들 손뼉 칠걸ㅋㅋㅋ 안전 여행하고!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친구야, 안전 여행하라면서 불안한 말은 왜 하니? 그나저나 콘텐츠 기획력과 비행 실력은 반비례인가? 천장에서 쏟아지는 신뢰의 블루가 무색하게, 폭 여섯 석의 기체가 매가리 없이 구겨질 알루미늄 깡통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비프 누들 기내식과 화이트 와인 두 잔, 한글 자막이 지원된 <바비>와 <나 홀로 집에>, 그리고 퍼석한 선잠으로 무탈한 일곱 시간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알마티에서도 키르기스스탄까지 버스로 네다섯 시간 더 가야 한다지만, 창 밖으로 바다를 지나 눈 덮인 산맥이 보이니 다 왔단 생각에 굽었던 허리를 쭉 펴봤다.


  "쏘리(Sorry), 이즈비니 떼(Извините)"

  백패킹 유튜버, 솔이가 42J석 승객에게 서툰 러시아말로 양해를 구하며 휴대전화 카메라를 창가로 내밀었다.

  "제가 대신 찍어드릴까요?"

  비행 동안 나와 솔이의 간헐적 소곤거림을 힐긋 대던 그녀가 갑자기 유창한 한국말을 건넸다.

  "어머! 한국말 왜 이렇게 잘해요?"

  연세대 석사 과정 중이라는 그녀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연말이 한국 명절과 비슷하다며, 자기도 가족과 보내기 위해 고향에 가는 길이라 했다. 카자흐스탄은 경유만 할 뿐 바로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간다고 하니, 여기 자연설 스키장이 더 멋지다며 아쉽다는 말과 간단한 러시아 회화 몇 마디, 현지에서 인기 있는 과자로 고체 치약처럼 생긴 말린 치즈를 알려줬다. (나중에 먹어 봤는데 맛도 고체치약이었다. 윽-.)

  그사이 비행기 바퀴가 팀킴의 라스트 샷 컬링 스톤처럼 착륙장에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42J석 창으로 기체가 카자흐스탄 상공에 오른 걸 보자, 반나절 비행의 피로감이 몰려와 낯선 여행에 대한 긴장을 오히려 소강시켰다. 아주 잠시. (Photo by 솔)



  오후 네 신데도(한국은 일곱 시) 알마티공항 입국심사소는 세 칸만 열려있었다. ㄹ자로 꺾인 대기라인을 다닥다닥 메운, 개기름과 피곤 범벅의 얼굴들 뒤로 우리도 (같은 몰골로) 줄을 섰다. 이곳 사람들 외모는 윤형근 화백의 농담(濃淡)처럼, 비슷하다 싶으면서도 한 명 한 명은 확연히 달랐다. 누구는 EBS <세계 테마 기행>에 나오는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유목민 같았고, 누구는 냉기가 흐르는 금발 러시아인에 가까웠다. 간혹 한국인인가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미묘한 이국적 분위기가 확실한 이질감을 줬다. 저 앞으로 연세대 과잠바를 입은 붉은 머리 외국인이 보였는데, 먼저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한 42J의 그림자 같기도, 우리가 떠나온 곳과 도착한 곳을 유약하게 잇는 실올 같기도 했다.


  바싹 마른 모래 낱알이 된 기분, 완벽한 이방인. 역설적이게도 진공된 고립감이 아직 본명도 잘 모르는 열 명의 동행을 향한 고밀도 의타심과 친밀감을 증폭시켰다. 자석으로 모래사장을 헤집으면 촤르륵 달려 올라오는 철가루처럼 인천에서 보다 좀 더 편해진 표정과 자세로 그들 옆에 붙어 섰다. 뭐, 장거리 비행이 꾸밈없는 외모로 만들어 준 탓도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여자 다섯, 남자 여섯. 97년생부터 77년생. 이 여행을 기획한 로드트립 스타트업 대표, 여행 기자와 콘텐츠 크리에이터, 의류 사업가, 그리고 그냥 회사원까지. 멤버들도 이 나라 사람들 외모만큼이나 닮은 듯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기대 못지않게 걱정됐던 것도 사실. 특히 사전 모임 때, 챙겨 올 촬영 장비 리스트와 이런 영상이나 릴스를 찍겠다며 레퍼런스를 보여주는 크리에이터들 사이에서 무념무상 여행객은 나 하나뿐인 거 같아 '역시 모르는 사람들이랑 여행 막 가는 거 아니었어...'하고 허공만 바라봤다. 나는 나이는 딱 중간이지만 직업적으로는 대부분의 멤버와 대척점, 그저 업무용 사교성만 발달한 전형적 회사원이니까. 들고 갈 장비라곤 고작 오후 한 시에 절반 넘게 배터리가 닳아 버리는 아이폰 11프로뿐이니까.



유독 석탄을 많이 때는 겨울이라 거대한 만년설 산맥 허리춤으로 매캐한 대기가 잔뜩 껴 있었다. 석양의 노란빛이 막 도착한 이방인을 달래주듯 착륙장을 내리쬤다.



  늘 그렇듯 이미그레이션은 긴장감에 비해 별일 없었고, 정작 수화물이 컨베이어 벨트 네 개에서 두더지 게임처럼 무작위로 나오는 바람에 조금 지체됐다. 마중 나온 가이드를 따라 15인승 하얀 벤츠 스프린터에 오르고 보니 벌써 밖은 어두웠다. 여느 나라들처럼 공항이 있는 외곽에서 좀 빠져나오면 도심의 분란한 불빛과 소음이 차창을 두드리겠거니 했는데, 한참을 달려도 고요했다. 유막과 성에가 엉킨 창을 팔꿈치로 문질러 이마를 바싹 대고 보니 광막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산사태 방지망 따위 없는 흙 절벽이 간간히 내 코끝을 벨 듯 스쳐가면, 그때서야 내가 탄 차의 속도를 느낄 수 있었다. 국경을 향하는 길은 가로등도, 지나가는 차도 하나 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상하게 밝았다. 달이 낮게 걸려선지, 아님 초원을 덮은 눈이 반사된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산 아래 손톱만 한 집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관측 가능 범주 밖 시공간으로 떨어진 기분에 살살 배가 아려 올 때쯤 차가 멈췄다.


  "국경 도착했어요! 다들 여권 꺼내시고 짐 챙겨서 내려주세요."


  배낭을 둘러메고 캐리어 두 개를 끌며 보도블록도 없는 찻길을 걸었다.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건물 두 채를 통과하고 나서야 처음은 카자흐스탄 출국 심사, 마지막은 키르기스스탄 입국 심사였단 걸 알았다. 알마티 공항에서 랜덤으로 뱉어져 나온 수화물처럼, 우리는 국경을 넘은 순서대로 키르기스스탄 공터에 주차된 카니발 세 대에 셋넷씩 나눠 탔다.

  


  "맞다! 언니, 글 쓰신다고 했죠? 언니 글 궁금해요."

  같은 차 보조석에 탄 여행기자 다이가 뒤를 돌며 말했다. 글쓰기 수업에 만난 상우의 제안으로 온 여행이라고 했을 뿐인데,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정과 멤버들만큼이나 의외의 내 포지셔닝도 생경했다. 근데 문뜩 '이들과 나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이 여행을 함께 하게 됐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감각을 표현으로 정박시키려는 사람들. 그렇게 자기를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마음들.


  이내 자동차 경적이 희미하게 들리더니 비슈케크의 가로등 빛이 차창에 번졌다. 차를 오른쪽으로 꺾자 알라토 광장의 대형 트리 조명이 뒷좌석까지 들이쳤다. 낯선 나라, 어색한 사람, 그리고 생경한 나에게로 허공을 겉돌던 바퀴가 조용히 연착륙했다.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알라토 광장의 대형트리. 함께 한 크리에이터들 덕에 경험을 멋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Photo by Vi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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