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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09. 2024

캐리어 두 개 배낭 하나

D-3·2·1 여행 짐 싸기


  겨울로의 여행도, 미리 짐을 싸보겠다 캐리어를 펼친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봤자 고작 출국 3일 전이지만.


지난 5년 간 베를린, 파리, 도쿄, 세부, 발리, 오키나와를 함께 한 24인치 캐리어를 꺼냈다. 여정 무관 절대 부피를 점령하는 스킨케어, 샤워 용품, 헤어 제품. 끊어진 끈고리로 몇 년 간 방치했다 이번에야 수선한 검정 등산화만 넣어도 벌써 한쪽의 반이 찼다. 속옷, 양말 아홉 벌. 히트텍 상하의 세 세트까지 넣고 나니 티셔츠 몇 장 쑤셔 담을 공간 밖에 안 남았다. 10년 전 엄마와 단벌 패딩으로 떠난 후쿠오카 사진이 준 교훈, '아우터가 하나면 4박 5일도 당일치기로 보인다'덕에 이번엔 적어도 겉 옷 세 벌은 챙겨야지 했는데. 공항까지 하나 입고 가도 두 벌을 넣기엔 무리였다. 뭐, 꾹꾹 눌러 담는다 해도 다 벗고 패딩만 입고 있을 것도 아니고. 결국 무인양품 기내용 캐리어까지 등판했다. 새로 산 15리터 배낭도 있으니 얼추 다 가져갈 수 있겠지. 여행 멤버 단톡방에 올라온 일정표를 다시 보고 일단 요가복, 수영복, 스노보드 보호대와 고글부터 챙겼다. 자,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 초효율 7박 9일 착장! 극강의 돌려 입기 신공으로 옷을 골라보자! 그런데 잠깐, 거기 날씨가 어떻다고 했지? 그제야 네이버 앱을 켜고 검색했다.


  '키르기스탄 12월 날씨' 아니,

  '키르기스스탄 12월 날씨'


AIR ASTANA KC 910편 42H석에서 본 알마티.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에 버스로 네 시간 반을 더 달려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었다.



  내게 여행은 무작정의 휴식. 유난스러운 도피였다. 누구는 여행 자체보다 준비 과정이 더 설렌다던데. 휴식과 도피 따위에 계획씩이나 세워야 하다니, 버겁다. 그래서 유독 여름나라로 떠났다. 뜨거운 볕을 희롱하듯 따돌리는 잠영과 물장구의 유치한 권능, 탑승하자마자 화이트 와인 한 잔 쭉 들이키고 자다 깨면 도착해 있는 가뿐한 비행거리는 늘 비슷한 선택지로 이끌었다. 특히 동남아 휴양지는 짐 쌀 때 탁월한 효용을 보여준다. 탁탁 접으면 손바닥만 해지는 옷가지, 짐 사이 막 끼워 넣을 수 있는 플리플랍, 여행지에서 하루쯤은 필요한 얇은 스트랩 힐과 호텔 헬스장용 러닝화까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어도 돌아올 때 말린 망고 스물 봉지에 면세점 위스키 한 병쯤 넣을 수 있다. 그래서 출발 바로 전 날 가방을 싸도 되는 쉬운 마음의 무게가 좋았다.


  그런 내가 이름도 헷갈리는 한 겨울의 키르기스스탄에서 연말을 보내겠노라 이렇게나 미리 짐을 싸고 있다니. 한 달 전 늦은 밤 카톡이 왔다. 올봄부터 다닌 글쓰기 클래스에서 가까워진 동생 상우였다.


  [ 누나! 연말에 뭐 함? 키르기스스탄 가자! ]

  연이은 "카톡!" 알림과 석양으로 달리는 캠핑카 섬네일의 링크도 떴다.


  「올해의 완벽한 마무리! 키르기스스탄에서 아웃도어 레저와 로드트립을 즐기고 싶다면 주목!


  클릭하고 들어 간 화면 타이틀 아래로 짧은 영상이 재생됐다. 대형 트리 베들레헴의 별에서 사방으로 뻗은 은하수 조명. 그 불빛에 안긴 눈 쌓인 알라토 광장(Ala-too Square). 해발 2,000미터 춘쿨착(Chon-Kemin) 만년설을 카빙 하는 스노보더. <반지의 제왕>에 나올 법한 교목 사이 무결의 눈 밭을 걷는 하이커. 눈꽃처럼 부서지는 이식쿨 호수(Issyk-Kul Lake)의 파도.



현지에서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해발 4,000미터 아벨라 고원(Ak-Baital Plateau)에서 내려오는 길.  


  "카톡"

  [ 누나, 로드트립이랑 캠핑 관련 플랫폼하는 내 친구가 기획한 거고 한 열 명 정도 모을 거래. 고고! ]


  짐 싸는 것만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나라, 누구랑 가는지도 모를 여행을 30초 유튜브 영상만 보고 33초 만에 승낙했다. 엄지로 두 번 액정을 쓸어 올리니 스키, 승마, 수영, 필라테스, 하이킹을 한다는 스케줄표가 나왔다. 출국은 2023년 12월 23일 오전 11시 40분. 입국은 12월 31일 오전 9시 55분.


  "내일 출근하자마자 팀장님한테 휴가 쓴다고 보고한다! 언제까지 확정해 주면 돼?"

 

  13년 회사생활 첫 동계 휴가다. 특히 작년 말 발령 전까지 5년은 새해가 되자마자 고객들에게 바뀐 정책을 고지하는 업무를 하느라, 1월 1일 카운트다운 폭죽과 환호가 팽팽해진 단두대 밧줄을 내리찍는 도끼 같았다. 숨 막히는 데드라인으로부터 드디어 방면된 올해 12월. 이제 딱 12분의 1 정박자로 흘러가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렘이었는데 해외에서 연말이라니! 단두대 밧줄 대신 도파민 시위가 당겨졌다. 팀장님 오케이를 받아 낼 최적의 보고 타이밍 설계, 옷장 속 패딩 종류와 유니클로 감사제 기간 확인으로 한 밤 중이던 마음이 대낮처럼 소란해졌다.



  그리고 벌써 여행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아이보리 숏 패딩 하나와 19,900원으로 산 히트텍 두 벌, 하늘색 니트 장갑까지 새 방한템을 완비했다. 하지만 자잘한 것도 가지가지. 낯선 곳에서 사소한 불편을 더하고 싶지 않아 최적의 편의로 엄선된 것들만 투명 지퍼팩에 나눠 담는다. 숱 많은 머리카락을 잘 버텨주는 GS25의 고무줄 한 움큼(올리브 영 것보다 짱짱하다). 샤워 후 안 쓰면 잘 때까지 찝찝해 어디에나 챙기는 면봉.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상비약. 장기 여행의 필수품 눈썹칼과 족집게. 손톱 발톱은 미리 깎아 둔다. 내 몸 하나 집에서 여행지로 옮기는데 이렇게 하찮은 영역까지 짐이라니. 짐을 싸다 보면 슴슴한 생활의 조각이 양각처럼 도드라진다.


해발 2,300미터 춘쿨착 리조트로 가는 길. 수도 비슈케크에서 자연으로 들어가는 첫 여정이었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부터 짐 가방에서 슬쩍 튀어나온 일상의 단면이 평소의 나를 약간의 거리감으로 인지하게 한다. 그러다 여행을 하는 시간보다 떠나겠다 결심하는 순간이 관성적 일상 속 나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왜 그곳으로, 그 사람들과, 그런 방식으로의 여행을 선택했느냐는 현재 나의 상황과 심상, 지금까지의 취향의 방정식이 뱉어 낸 답같다.

  올 해부터 정시 퇴근과 홀가분한 연말이 가능한 부서로 이동한 덕에 생각에만 머물던 글쓰기 수업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알게 된 상우는 종종 맥주를 마시며 "누나의 세계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제안한 로드트립은 자연 속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내가 반하고도 남을 스케줄로 채워져 있었다. 휴식이나 도피가 아니었다. 낯설지만 당연한 여행. 떠나기 위한 대단한 용기나 무리한 조정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연말에 쓸려 가던 나를 붙잡고, 몇 땀 남지 않은 2023년의 당연한 매듭은 이 여행이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거기 전쟁 지역 아니야?", "그럼 모르는 사람들이랑 같이 방 써?"라는 친구들의 걱정에 나는 천진하게 되물었다. "근데 지금의 내가 아니면 평생 이런 여행 못 할 것 같지 않아?"



  겨우 3일 차 착장밖에 못 꾸렸는데, 틀어 둔 한 시간 사십 분짜리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겨울 밤하늘 은하수를 본 다면 이 노래를 들을 거야'가 언제 끝났는지 방 안이 고요했다. 무력하게 펼쳐진 두 캐리어 위로 1차 라인업에 오른 옷과 모자, 장비가 무릎까지 쌓였다. 여행지 날씨는 모르겠지만 내 취향과 취미는 선명하게 보였다. 저기서 또 절반은 줄여야 하는데, 아휴, 모르겠다. 결국 또 전날 다 싸겠지. 일단 옷방 불을 끄고 나왔다.



'동화'라는 뜻의 스카스카 캐넌(Skazka Canyon)을 향하는 길에 보이는 이식쿨 호수 너머 알라타우(Künkey Alatau) 산맥. 구름이 아닌 만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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