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예술, 그리고 삶에 대한 짧은 단상들(1)
1.
최근 들어 극장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앞서 겪은 두 번의 불만족스러운 극장 경험 때문인가, 극장에서 자무쉬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최근 개봉한 영화들에선 썩 즐거움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거의 왕복 두 시간에 영화 두 시간, 아트하우스 영화를 찾아보기 위해서 필히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다. 네 시간이라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사전 정보를 찾아보다 보면 또 나름대로 어떤 견적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오만한 속단이니 하면서 막상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 또 적지 않은 경우에 그 속단이 들어맞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극장을 나오는 발걸음은 마치 밥 한 끼 든든하게 챙겨 먹어 만족스럽지만 속이 무겁지 않은 아주 홀가분한 발걸음이긴 하지만 뭐 아무튼, 그냥 확률 싸움에서 졌을 뿐이다.
다름 아닌 그 두 번의 경험은 <놉>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였다. 딱히 이 영화들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놉>에선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이렇게까지 숭고하게 받아들일 일인가 싶었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선 ‘또 이런 청춘 영화! 청춘은 언제까지 맨날 이런 불안정한 존재여야만 하는지!’ 이 또한 전 세계적으로 이미 유형화된 유럽식 청춘 상의 한 전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씁쓸한 것은 이 영화들을 감상한 사람들 중 다수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영화들 자체가 그리 많은 관객을 만난 영화들은 아니지만 ‘남들 다 재밌다는데 나만 재미없대’ 식의 소외감은 적잖이 슬프다.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몇 공감받지 못할 이야기를 주저리 써대는 것은 썩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정말 이들이 좋은 영화였을까?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영화들의 장점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을까, 영화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한 건가? 그냥 취향 문제인가?’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2.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화, 이보다 더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 적합한 영화가 어디 있을까. 관객들이 공감하고 즐거워했으며 적잖이 아름답게 느끼는 영화라면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설령 절대적인 관객수가 많지 않더라도 그 호불호의 비율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 그래서 뭐? 당신이 재미없었으면 그냥 재미없는 거지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당연한 논리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한테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그것도 ‘좋은 영화’가.
3.
그래 알겠다. 사람들이 이 영화들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알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의문은 그 어떤 ‘맹목성’이다. ‘맹목성’이라, 무엇에 맹목적인가? 모르겠다. 그냥 맹목적이다. 굳이 찾아보자면 영화가 대체 뭐 그리 대단하길래 그 숱한 상징들과 거대한 담론으로 추앙해야 했는지, 매번 최악의 선택들을 하면서 성장하는 그 청춘의 모습이 정말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그런 것들이 맹목적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간단히 말해서 영화에 맹목적이고 청춘에 맹목적인 셈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맹목적이란 말을 반복하면서 맹목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 또한 맹목적이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 맹목적인 것은 누구인가. 나인가 그들인가.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그렇다. 결국 사람은 맹목적이다. 누구나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논리를 펼쳐나가지만 그것을 허물어버릴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는 항상 존재하고 그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자기 세계를 향해 맹목적으로 숨어버리곤 한다.
4.
하지만 이런 맹목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르다. 극장에 발을 잘 들여놓지 않게 된 이후 집에서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보았다. 카사베츠의 입문작으로 이 영화를 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으면서도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카사베츠가 메이블이라는 불안정한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는 나에겐 엄청난 의미였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담론처럼 보인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메이블은 신경쇠약에 가까울 정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영화는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 신경쇠약의 원인을 살피지 않는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것이 신경쇠약인지조차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또한 메이블이라는 인물에 대한 일체의 가치판단조차 없다. 그래서 이토록 불안한 인물을 보듬어주어야 하나? 아니면 치료가 필요한 건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삶의 아주 짧은 한 부분을 그대로 도려내어 보여준 것만 같다. 오히려 그녀가 요양원에서의 일들을 말하는 장면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한 부분을 장면화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판단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카사베츠는 그저 인물들을 만들어 어떤 시대와 공간 속에 떨어뜨려 놓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혼란스럽다.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스스로 내적 담론에 휩싸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주는 일말의 실마리는 그 제목 속에 있는 '영향'이라는 단어뿐이다.
그렇기에 <영향 아래 있는 여자>는 맹목적이다. 카사베츠의 이러한 화법은 어떤 특정한 목적성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맹목적이기에 삶을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담아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맹목적인 인간들, 맹목적인 삶, 결국 이 세계에 만연한 맹목성을 담아내는 방식은 그것을 맹목적이게 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메이블의 정신불안의 원인을 규명해 본다면, 어린 시절 불안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시작해 70년대 미국 중산층이 가지고 있던 불안을 대변하기도 하고 억압적인 가부장제에 따른 여성의 역할 고정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서술되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영화상의 텍스트가 풍부해지며 우리에게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전달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러한 작법은 결국 어떤 인물이 현재의 인물이 되기까지 그 정해진 길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정신불안을 앓기까지 그 30년 이상의 세월을 몇 가지 사건으로 원인을 규명한다는 것은 다소간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소한 어긋남들과 그것들이 모여 모여 만들어내는 어떤 하나의 자아는 단순화시키기에는 다소간 우리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경험했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규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카사베츠의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높게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5.
앞선 두 작품에 대해서 맹목적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지칭한 맹목성과는 다른 것일 테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놉>과 <사랑~>의 맹목성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추앙하고 보듬어주는 아름다움을 향한 맹목성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그토록 맹목적이게 바라볼 만큼 절대적인 가치라는 생각은 안 든다. 그리고 그들이 맹목적으로 향하고자 했던 목적지로 가는 길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닦아가는 모습이 썩 피곤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맹목성이 향하는 방향이 조금은 잘못 설정된 것 같다고 느껴진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소간 카사베츠의 방법론은 다수의 관객과의 소통 가능성에서 약점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인물을 최대한 풀어놓아 삶을 포착하려는 영화들은 가끔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향~>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권하기엔 입이 쉽게 떨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에 갇혀 철저하게 짜인 세계와 캐릭터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과 이야기 혹은 메시지가 만들어내는 카타르시스를 썩 좋아하기도 한다. 영화가 메시지를 품어야 하냐는 그 숱한 논쟁에도 메시지가 도드라지는 방식이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고 지향하는 방향에 맹목적으로 파묻히기만 하려는 태도가 썩 달갑게 다가오지는 않을 뿐이다.
6.
<놉>과 <사랑~>의 맹목성은 단지 이 두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쩌면 현대 영화와 사회의 흐름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 사회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해체시키며 다양성을 회복시키려는 다원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다소간 다양성이라는 획일성에 빠져드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양성과 자유로움, 나 다움을 외치지만 그 외형은 사실 어떤 특정한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두 영화에서는 각각 그것들이 영화와 청춘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토타입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것이 형성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을 받는 가치들은 긍정적일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또한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변화는 적잖이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계속해서 힘을 얻어가며 스스로가 또다시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도 없다. 즉 앞에서 말한 맹목적으로 파묻히는 태도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프로토타입에 자그마한 빈 틈을 찾아내기 위해 항상 경계하려는 태도, 그것이 대중들과 감정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창작자가 지녀야 할 태도일 것이다.
이 쯤에서 이 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