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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주 Nov 20. 2021

아네트 ‘세상을 무대로 펼친 영화
오페라’

<아네트>의 영화적 해체와 그 성취에 대하여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주요 내용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난해하다’, ‘당황스럽다’

이 영화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만한 감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기이한 따뜻함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레오 카락스가 보여준 영화에 대한 존중과 애정에 있었다.


영화는 조작의 예술이다.

아무리 잘 구축된 리얼리티라고 하더라도 미술과 음악 연기 등등 모든 영화의 장치들은 꾸며낸 것이고 촬영 과정 또한 분절적인 순서를 따르고 편집은 가장 잘 조작된 컷을 고르는 과정이다.

이렇듯 영화는 태생적으로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레오 카락스는 이러한 영화의 태생적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애초에 영화에서 리얼리티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곧 또 다른 영화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아네트>는 이런 ‘조작의 미학’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결과물이라고 보고 싶다.

물론 이 '조작의 미학'만이 영화의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거친 영화들은 역사적으로 많았지만 내러티브와 리얼리티의 요구 아래에서 점점 그 관심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의 형식적 가능성을 다시금 조명하도록 만든 것은 주목할만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자신이 영화임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숨도 쉬지 말고, 방귀도 뀌지 말 것’

이는 오페라 무대에서나 나올 만한 안내멘트이자 동시에 스탠드업 코미디에 나올만한 농담조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오페라와 스탠드업 코미디, 즉 고급 예술과 대중예술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오페라와 영화의 관계로도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곧 오페라이자 영화인 ‘영화 오페라’가 시작한다고 일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는 거리를 비추는 화면 위에 붉은색 주파수의 파형이 일렁이며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파수가 맞춰지는 듯한 모습이 나타난다.

계속되는 컷에서도 스튜디오 안의 악기들을 비추는 화면은 주파수 조정 소리와 악기들이 준비되는 소리에 맞춰 조명이 일렁이며 화면 또한 함께 조정되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영화는 시작부터 영화 속 세계에 대한 제시라든지 영화적 리얼리티 형성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 또한 그 시선은 영화 속이 아닌 바깥에 있는 것 같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May we start’는 그 자체로 음악의 가사가 될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한 극 중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 밴드 스파크스도 그 대열에 있다는 점에서 오프닝에서 영화가 그리고 있는 공간은 극 중 세계가 아닌 관객의 세계인 것 같다.

오프닝 시퀀스가 거의 유일한 원테이크 시퀀스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영화에서 리얼리티성을 가장 잘 지켜낼 수 있는 방식은 아마도 원테이크일 것이다.

물론 카메라의 시각에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영화가 현실의 시간과 함께 흐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원테이크가 유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와 현실의 물리적 거리감을 극도로 좁히면서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오페라 극장에서의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형상화한 듯한 느낌도 든다.

이렇게 영화는 자신이 ‘영화 오페라’ 임을 밝히고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관객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동시에 이것은 앞으로 시작될 공연이 가짜임을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물들이 공연 속 인물이 아닌 그 스스로의 상태로 관객을 먼저 만나고 공연 속 인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배우와 역할이 분리되는 과정을 관객이 직접 보게 된다.

즉 리얼리티의 조작이 일어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존재 자체도 극 중 리얼리티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퀀스라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공연과 철저히 분리된다.

더군다나 그것이 관객의 리얼리티와 가깝다는 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서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관객이 영화로 들어오게 하기보다는 관객에 자리에 있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장부터 자신의 패를 공개한 영화는 몰입의 힘은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시작부터 영화가 오페라 공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그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비현실적인 장치들과 리얼리티를 저해하는 요소들에 대한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는 몰입을 방해하는 수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먼저 오프닝 시퀀스에서도 그랬지만, 오페라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관객을 계속 관객석의 위치로 밀어 넣는다.

앤의 오페라 장면이나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 장면이나 아네트의 공연 장면까지도 관객석의 시선이 한 번씩은 꼭 등장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관객의 입장이 되도록 만든다.

또한 오페라를 빙자한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의 연속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요트 장면은 대놓고 세트장 혹은 무대장치 같은 조작된 느낌의 연출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죽은 앤은 오페라의 무대의상 같은 분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무리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라고 하더라도 관계를 갖는 도중에 노래를 한다든지 음악에 맞춰 절정으로 치닫는다든지 하는 장면 또한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하물며 지휘자는 익사 직전에도 노래를 부른다.

이런 요소들은 분명 오페라의 형식을 차용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관객을 당혹하게 만들고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反) 리얼리티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관객이 극과 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잘 드러나는 이유는 오페라의 형식에 대한 보전이다.

애초에 영화의 시작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극은 하나의 오페라임을 분명히 표명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오페라적 관습을 따른 것이다.

앤이 죽은 이후에 무대의상 같은 분장으로 등장하고 거의 모든 대사가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로 처리되는 것은 이것이 오페라임을 생각한다면 전혀 이상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오페라적 리얼리티에 충실한 연출이라고도 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오페라의 형식을 철저히 보전하고 그것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면서 '영화 오페라'라는 아주 특별한 장르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된다.

일례로 앤이 오페라 무대에서 부르는 아리아는 그 무대 뒤편이 광활한 숲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오페라의 무대가 영화라는 형식의 힘을 빌려 그 무대를 무한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영화 오페라' 만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적인 혼란을 주고 관객이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오페라가 영화를 만나 형성된 이 '영화 오페라'의 태생적 특징 때문에 이 영화는 반(反) 리얼리티적 영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극 영화라고 한다면 영화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그 속에서 어떤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읽어내려 하고 리얼리티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또한 극 중 오페라 속의 이야기는 선형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그 스스로의 리얼리티를 확립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오페라적 연출과 관객과의 거리두기는 내러티브의 리얼리티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는 관객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철저하게 그들만의 이야기인지 우리의 이야기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영화에 감정적으로 기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영화적 해체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의 몽타주도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작동하기는 매한가지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으로는 헨리가 소파에서 일어나면 아네트의 다리처럼 보이는 인형의 다리가 마치 헨리에게 깔려 있었던 것처럼 등장하고 카메라가 그것을 빠르게 줌 하면 TV 화면 속 관중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제시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충격을 주는 장면일 것이다.

아버지가 딸을 깔고 앉았고 그것을 보고 웃음을 터지는 장면이 불과 5초 이내에 제시되었을 때 충격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몇 없다.

어쨌든 이러한 방식의 몽타주 활용은 그야말로 지극히 양식적인 영화적 테크닉이고 이는 우리가 극 속 리얼리티를 구성하는데 혼동을 준다.

또한 앤이 차 뒷좌석에서 잠드려는 순간 캘리포니아 산불 뉴스에서 헨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기자회견 장면으로의 전환이 있다.

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조합으로 리얼리티를 파괴하고 관객들이 영화와 거리를 두도록 하는 장면일 것이다.

더욱이 꿈이라는 요소와 어울려 산불이 진실인지, 헨리의 폭력성이 진실인지 아니면 헨리가 마치 산불 같은 존재인 건지 아니면 모두 다 거짓인지 영화는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헨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동안 오페라 속 앤이 죽는 장면이 반복해서 잔상으로 나타난다든지 아네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날아다니는 아네트 뒤의 배경이 조악하게 변화하면서 마치 아마추어 영상의 느낌까지 주기도 하는 것은 분명 이러한 영화적 해체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정교한 리얼리티를 전달하기보단 어떤 인상을 계속해서 전달해준다.

단순히 말해서 영화의 내러티브, 정교한 캐릭터 묘사, 인물의 감정보다는 특정한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그것들과 음악의 조합을 통해 감정적이기보단 감각적인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속에 질투와 분노, 갈등, 살인 등등 비극적인 장치들을 몰아넣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서사를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의 인상과 감각으로 느끼도록 만드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감각 자체도 역시나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거나 취할 수 있는 종류의 감각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영화적 조작, 해체, 이미지와 감각으로 전도된 극 중 이야기는 철저하게 현실과 분리된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아네트가 있다.

다른 요소들은 다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이 인형으로써 표현된 것은 리얼리티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다.

물론 실제 아이가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이기에 인형을 썼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인형탈을 벗고 사람이 되는 타이밍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런 아네트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영화의 톤 자체를 바꿔놓는다.

마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하고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실사 이미지만큼이나 충격적인 느낌까지도 전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아네트라는 인물을 서사에 중심에 두면서 마치 영화가 하나의 동화 혹은 우화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아네트라는 존재를 통해 반(反) 리얼리티를 완성한 것이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관객을 관객의 위치에 두고 관객이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이야기보다는 영화적 감각에 집중시킬 수 있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물론 영화적 감각 자체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그것 만으로는 여전히 영화가 멀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만 보자면 영화가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으로 경도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의 표현 방식이 가장 처음에 언급한 '조작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관객을 계속해서 영화 밖으로 이끌고 모든 영화의 형식적 장치들을 날 것으로 내어 보여주면서 관객과 감독 사이의 거리를 좁힌 것이다.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나 어떤 영화적 장치가 주는 감정적인 울림이 없더라도 적어도 <아네트>는 그것이 현실인 양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

관객이 영화 속에 존재하기보단 관객석에 머물고 있음을 자각시키면서 영화가 가진 형식적 언어를 날 것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필히 감독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세상 속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닌 관객의 옆자리에 앉아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는 또 다른 방식의 관객 지향적인 영화인 것이고 어쩌면 이는 관객에 대한 존중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났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영화의 서사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먼저 영화는 이러한 형식적인 해체를 등에 업고 스토리텔링의 극단을 달린다.

질투와 살인, 아동 착취, 그리고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딸까지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요소들로 가득 채워놓았다. 

애초에 이러한 형식을 통해 이야기가 철저하게 허구이고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오페라라고 못 박았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요소들을 나열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현실과 극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바로 '아네트'라는 존재를 통해서다.

아네트가 탈피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던 가짜 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장 반(反) 리얼리티 적인 아네트를 현실의 존재로 탈바꿈시키면서 이야기 자체가 현실의 존재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영화가 계속해서 말해왔던 질투와 살인, 아동 착취 등등 이 모든 비극적인 장치들이 온전히 허구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남의 성공이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앤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 대신 죽어줄 사람을 죽인 것'에 분노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스타 숭배와 윤리성의 문제와 무관한 것 같지 않다. 

아네트의 공연 영상이 아동 착취라는 비판에도 8천만 뷰를 넘어서는 것도 결국 유튜브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윤리성 문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네트가 마지막으로 공연하는 행사가 '하이퍼 볼'이라는 점에서도 현대의 모든 자본과 대중문화가 집결되는 '슈퍼볼'을 떼 놓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도 결국 영화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현실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의 방향성은 막바지에 다다르고서야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시종일관 태연하게 모든 비극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보이는 대로 그것들을 즐기거나 흘려보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 그 책임을 어느 정도 관객에게 전가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앞에서 주저리 열거한 모든 형식적인 장치들 또한 이러한 충격효과를 위해서 제시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네트>는 지극히 자전적인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씁쓸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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