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션펌킨 Jun 04. 2022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9

알콜중독인 남자친구, 나는 과연 괜찮은가.


드라마가 등장인물 "구씨" 신드롬을 일으키며 막을 내렸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구씨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가슴 졸여왔었다. 죄를 짓고 숨어들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술에 취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매일매일 성실하게 염씨네 씽크대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봐선 악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나쁜 길에 빠져들었다가 큰 상처를 입고 숨어들어 치료를 하고 있는 듯했다. 동물들이 상처입으면 은신처에 숨어 들어가 상처가 아물 때까지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드디어 그의 과거를 맞닥뜨렸다. 그도 당황했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 입장의 나도 무척 놀랐다. 그의 과거로부터 온 사람은 "네가 죽였잖아."라고 했다. 같이 살던 여자, 그의 여동생을 구씨가 죽였다고 말이다. 갑작스런 과거와의 대면에 구씨는 무너져내린 것 같았다.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죄책감과 원망 같은 감정들이 부유물이 떠오르듯 뿌옇게 떠올라 힘들었을 것같다. 


"피곤해 보이네."

"10킬로를 걸었다."

"왜?"

"... ... 지갑이 없었어..."

"쉬어요."


10킬로...성인 걸음으로 두어 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정말 지갑이 없었을까... 같이 살던 여자가 자신이 했던 말 때문에 자살을 했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백사장이 동생 죽인 원수라고 복수하러 올 것이 두려워 그랬다고 하기에는 굳이 거짓말까지 했어야 했나 싶다. 

차라리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백사장으로부터 산포식구들을 지킬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면 어땠을까?

그만큼 스스로도 사랑했던 여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나라도 그랬을 것만 같아 더욱 심장이 저려왔다. 

혼자 벌을 받자.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말고 혼자 벌 받고 끝내자. 구씨의 마음은 그랬겠다. 하지만 세상만사,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죽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쉽게 죽어지지도 않는 것이 세상일이더란 말이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 그를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쉬라고 하며 자리를 피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라면, 한 번 더 물어봐 주기를 바랬을 것 같다. 가만히 옆에 앉아 있어주었다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말을 꺼냈을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쿨한 척 하려고만 할까. 쿨하지도 못하면서. 

막내딸 미정과 이름도 모르는 구씨가 사귄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아버지의 등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구씨 집에서 나오는 딸을 보고 이유를 묻는 엄마는 둘이 사귄다는 말에 당황해 했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어이없어 했지만 막내딸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런 엄마와 딸의 대화를 가만 듣고만 있는 아빠의 뒷모습은 더 애처로웠다. 

막내딸이 사귄다고 말하고 난 후, 구씨를 붙잡아 보려고 아버지가 나섰다. 처음으로 구씨가 쉬는 곳에서 나란히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여 미래를 말하는 아버지는 평소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하던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묻지도 않은 말들을 먼저 하면서 구씨를 붙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었다. 

큰 언니 기정이만 빼고 염씨네 식구들은 막내 딸과 이름도 모르는 구씨의 사귐을 받아들였다. 

어째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이름도 말하지 않는 타지 사람이 어느 날 갑지가 마을에 들어와 매일 술만 마셨다. 동네에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들이 퍼져갔고 일손이 부족하던 염씨는 겸사겸사 그에게 일을 맡기며 골방에서 그를 꺼내냈다. 그런 그가 막내 딸과 연애를 한다는데, 아무런 잡음이 없다. 

이미 그는 그들 가족 안에 들어와 있었고 오히려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서울 남자가 사고로 기억상실이 되어 시골 마을에 흘러 들어왔다가 시골 마을에 사는 처녀가 그를 돌보다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신파극인가 싶을 정도였다. 

말하고 보니 크게 다르지도 않다. 결국 구씨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고 막내 딸 미정을 잊지 못했다. 만약 잠깐의 연애로 아이가 생겼고 떠난 구씨 몰래 미정이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되었다면 아주 실망할 것 같았다. 다행히 나의 걱정은 기우였고 결말은 예상을 벗어났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당사자, 내가 당사자였다면 나는 과연 그와 말이라도 섞었을까? 알콜 중독자, 패배자, 스스로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그를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는 점은 다행한 일이지만 가까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염미정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겠지...

어느 날 문득, 머릿속 퍼즐이 맞춰지는 때가 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걸까? 그 때 왜 나는 그 곳에 있었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나쳐간 수많은 일들이 돌이켜 보니 이유가 있었고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사랑하던 여자가 자살을 하고 상실감에 빠져 있고, 그녀의 오빠가 그를 배신하고 조직의 힘을 빌어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약속 장소에 못미친 곳에서 내리는 바람에 화를 면하게 되었다. 잠깐 졸다가 "내려, 내리라고!"라는 외침에 놀라 눈을 뜨고 그 소리에 이끌려 전철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목적지가 아니었고 전화기도 놓고 내린 상태라 그는 다시 약속장소까지 가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자신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백사장과 그 무리들이 이미 그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숨어들은 마을이 산포였고 염씨 일가가 사는 동네였다. 

숨어 들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술을 마시는 것 뿐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일거리도 없는 겨울, 골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며 자신을 탓했으리라. 세상을 원망했으리라. 내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리라. 차라리 그 때 죽었으면 어땠을까...했으리라.

자신을 살려낸 목소리가 고맙기도 했다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살만해 질 때면 궁금했을 것이다. 나를 살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왜 그녀를 만나게 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 고통의 끝이 어디일지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내 사지가 없어진 것과 같은 기분일까?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하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상태?!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 

구씨, 그의 깊은 상처 바닥까지 이해할 수 없음에 미안할 따름이다. 

작가의 이전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