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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물들다 Feb 15. 2023

2. 우연히 나에게 주어진,

예상치 않았던 직업을 만나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학원과 도서관을 오가며 입시공부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시골집에서 부쳐주는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아 소비를 최소화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입시가 있던 날은 얼마나 날씨가 혹독하게 추웠던지 변변한 코트가 없어 얇은 카디건으로 버티던 때라 그 겨울이 더 혹독하게 추웠던 거 같다.


카디건을 입고 시험장에 들어서니 번호가 8번이라 뒤쪽 맨 끝 문 앞이었다. 덜덜 떨며 시험지를 받아 드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험을 마치고 터덜터덜 떨며 정문 앞에 다다르니 친구가 서있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렇게 친구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때 친구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 그 계통으로 취직을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의 둘째 언니 친구가 명동에 유명한 양잠점을 하고 있었다. 언니한테 친구를 데리고 찾아갔다. 너무나 세련되게 변한 언니가 낯설고도 부러웠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면서 이런저런 서울에서 살아가는 애로사항도 이야기하고 조언도 해주면서 며칠 뒤에 나보고 다시 들러달라 하셨다. 며칠 뒤에 찾아가니 뜻밖의 제안을 하신다. 명동에 ㄴ 백화점에 취직을 해보라 하셨다. 네 친구는 아무래도 이 계통은 아닌 것 같다고. 난 당황스러웠다. 친구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생활비를 언제까지 시골에 기대 살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학은 이미 떨어진 상황이었고 2년제 문예창작학과, 문헌정보학과를 찾기도 힘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뒤 테스트 시험과 면접을 보고 난 이렇게 백화점에 발을 들였다. 


패션 비즈니스로 30년을 이 길을 갈 거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친구는 언니가 있는 미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로 다시 시골로 돌아갔고, 난 생활전선에 홀로 남겨져 외롭고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패션 3팀에 배정을 받고 혹독하고 매서운 현실에 눈물을 쏟으며 8시 출근 11시 퇴근을 했다. 그때 그 육 개월의 인턴 생활이 내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고 살면서 웬만한 일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이때 몸소 체득하게 했다. 그때가 매장관리 매니저의 첫 출발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시절에는 나름 괜찮은 직업 축에 들었다. 시골 부모님과 형제들도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에 나름 흐뭇해했다고 한다. 글을 쓰고 싶어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 꿈은 현실 속에서 가슴 밑으로 소멸되어 작아졌다. 




북가좌동 항만 아저씨네 미옥언니 집 근처로 집을 옮겼다. 미니 3층집이었는데, 일층에 방이 두 개에 부엌도 따로 있고 화장실도 따로 있는 집이었다. 이사를 하고 서서히 직장과 현실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주인집은 3대 모녀들이 살고 있는 좀 특별한 삶의 구조였다. 왕 할머니는 비단장사를 하시며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무역상을 하셔서 많은 돈을 버셨다고 한다. 최초의 ㅇㅇ필름 코리아라는 회사를 서울에 인수하시고 외동딸의 남편인 사위에게 회사를 맡기셨다. 


주인아주머니가 왕 할머니의 외동딸이고, 주인아주머니 첫째 딸이 같이 살고 있는 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ㅇㅇ언니다. 나중에 알고 난 사연은 주인아주머니는 E대 출신에 왕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외동딸로 자라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좀 외로움을 많이 타고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좀 나약하고 사치스럽지만 남에게 쉽게 정을 주는 착한 분이셨다. 매사에 왕 할머니인, 옹골지고 타협이 없는 어머니와 충돌하곤 하셨다. 두 분 다 서로에게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아주머니의 첫째 딸인 언니는 상냥하고 매사에 분명하고 이해와 사리가 밝고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린데도 참 많이 의지하고 많은걸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아주머니는 남편인 사장님이 비서와 사랑에 빠져 딸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시는 바람에 이혼녀로 혼자가 되신 거였고 언니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들어갔다 결혼해서 캐나다서 1년을 살다 이혼하고 홀로 엄마한테 돌아온 거였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사연을 가진 모녀들이었지만 그저 심플하게 서로에게 간섭 없이 밥도 각자 따로 해 먹는, 그렇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끈끈하게 서로를 버팀목으로 살아가는 가족이겠구나 그렇게 이해했다. 


언니 덕분에 연극에 눈을 뜨고 재즈 음악을 듣고 연극계에서는 김금지, 무대 위 맨발의 디바 이은미, 공연을 이끌던 송승환 씨와 인사를 하는 팬이 되었고 김금지 씨 가 하던 백화점 구둣방 고객이 되었다. 


3년을 이 집에서 가족처럼 살고 있을 때 언니가 회사로 전화가 왔다. 다급하게 "ㅇㅇ야 집에 불이 났어. 어떻게든 빨리 들어와라." 난 이 상황이 뭐지?! 손이 덜덜 떨렸다. 집 근처까지 가니 매캐하고 집 앞 도로가 시커먼 먼지와 물범벅으로 어지러웠고 3층 예쁜 집은 형태가 흉물스럽게 변해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참혹한 광경이 나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았다. 일 층 내가 사는 공간은 거실이 까맣게 소실되고, 방은 문을 닫아놓은 덕분에 벽과 문짝만 태우고 물건들은 그을렸지만 탄 냄새가 배어 건질 수 있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이층 삼층은 공간이 거의 반은 소실되어 뼈대만 있었다. 이층에 있던 언니가 시간 날 때마다 한곡씩 가르쳐주던 피아노도 반쯤 타서 일그러져 있었다. 지하 보일러실에서 불이 났는데 불은 위로 솟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살다 이런 일도 겪는구나.." 나의 소중한 추억들, 매일 써 내려간 일기장 소품들은 이렇게 불쏘시개가 되어 연기로 사라졌다. 




보증금과 손해배상금을 받고, 난 이사를 했다. 큰일을 겪은 뒤라 서로에게 위로나 안아주고 마음을 챙겨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감이 희석되어 가라앉으니 언니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지만 어디로 이사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어디에 살고 있을 언니가 많이 보고 싶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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