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 성우 면접을 가다.
패션 비즈니스 일을 하면서 내가 코디 쪽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가면서 패션 코디네이션 쪽으로 전문학과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을 때, 일본에는 이미 그 계통이 활발하게 성장 중이고 전문 학과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심각하게 일본 유학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나이도 결혼적령기에 들어가 있었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할 만큼 열정과 절실함이 지금의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직장동료의 대학 친구 소개로 미팅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 연애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지만 남자 친구는 행시 준비로 고시원에서 아직 공부 중이라 결혼에 대한 미래가 정해진 상황은 아니었다.
항만청 아저씨는 서울로 오시면서 항만청을 바로 그만두셨다. 아저씨에겐 딸 셋에 오빠인 아들이 있었다. 오빠는 신촌에 Y대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언니도 H대 학생이었다. 재취업이 어려워진 아저씨네는 생활이 급속도로 어려워져 모두 학교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째 언니가 학업을 중단하고 제일교포인 파친코 사업을 하고 계셨던 남자와의 재혼을 선택했다. 언니의 일본행은 친정을 살려야 한다는 가슴 아픈 선택이었고 희생이었다. 형부의 도움으로 아저씨네는 북가좌동 2층집으로 이사하셨고 오빠도 학업을 마치고 대기업에 들어가며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언니가 있어 준비를 한다면 일본으로의 유학길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부모님도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아버지 반대가 심각했다. 결혼할 나이에 어디 외국, 그것도 일본으로 가냐며 공부는 무슨 결혼이나 하라고 날벼락이 떨어졌고, 남자친구도 고시원 생활을 접고 공기업에 들어가겠다고 일본행을 반대하며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공기업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방송국 성우모집이 있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현실이 답답해 변화가 필요했다. 주위에서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난 내 목소리가 실제와 전화 목소리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전화를 받는 고객이나 거래처분들께 자주 들었던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다는 말만 믿고 겁도 없이 스펙이나 정보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보기 좋게 낙방하고 상처 하나가 덧씌워졌다. 이런 도전의 많은 갈래들이 인생에서 나를 성장시키기도 또 좌절하게도 하며 나를 조금씩 완성해 가고 있었다.
공기업에 입사한 남자친구와 결혼을 선택하면서 일본유학의 꿈을 접었다. 30년을 패션 쪽에 몸담으며 만나고 헤어진 인연들의 이야기를 이제 하나씩 꺼내어 나의 결핍과 함께 글로써 담아가고자 용기를 내어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소멸되어 잔재만 남는다. 가끔은 기억을 더듬어 물어본다. 그때 유학을 선택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낸 삶을 후회해서가 아니다. 인생에 답이 없듯이 기억되지 않는 소멸이 흐릿하게 시간 속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