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을 신는, 종갓집 큰며느리
공기업에 입사한 남자 친구의 연수원 교육이 끝날 때쯤, 결혼 날짜를 잡기 위해 양쪽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서로의 집에 방문하기로 연락을 드렸다.
우리 집은 서부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면 종착역인 충청도 끝자락에 있는 소읍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전라북도가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우리 집 남매 들은 배를 타고 건너 도시로 학교를 다녔다. 날씨가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배가 결항되어 학교를 가지 못하거나 오후에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면 집에 돌아올 수가 없어 친구집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 불편함이 싫었다. 오빠, 언니들은 그렇게 3년을 견디며 졸업들을 했지만 난, 2학년을 올라가면서 하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돌한 막내딸이었다.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동구밖에 깨끗한 피부에 하얀 머리가 보기 좋게 반짝이는, 뒷짐지고 서 계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임을 금방 알아보게 하셨다. 벌써부터 나와서 우릴 기다리신 거다.
반갑게 안아주시며 "고생했다, 오느라고 ㅇㅇ야." 남자친구 이름을 부르신다.
남자친구집은 전라남도다.
광주에서 내려서도 1시간 30분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씨족 마을의 종갓집 큰아들.
끝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하이힐을 신고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 대나무 숲에 가려 흐릿하게 마을이 보인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놀랍다.
빽빽이 둘러쳐진 대나무 숲에 가려진 커다란 울타리로 겁도 없이 하이힐을 신고 따라 들어갔다.
그곳이 남자친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었다.
우리 집은 소읍이래도 중간도시 같은 곳이라 집도 양옥이고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덕에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농사를 짓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우리 집 생활과 남자친구 집 생활은 참..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마당 한편 소우리 안에 커다란 소가 코에 코뚜레를 걸고 슬픈 눈으로 우릴 맞았다. 무서워서 남자친구 뒤로 바짝 숨어서 지나니 돼지우리 속 돼지들이 꿀꿀대며 서로 부대끼며 음식물 찌꺼기 같은 것이 담겨있는 통에 코를 박고 먹고 있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지 매캐한 연기가 굴뚝을 타고 마당까지 번지며 연기가 안개를 피우듯 자욱하다. 벌써 눈이 따갑다.
사랑채에 앉아 뒷문을 여니 빽빽한 대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에게 부딪히지 않으려고 같은 방향을 향해 누웠다 일어나길 반복한다. 대나무 소리가 '쉬이, 쉬리리~휘리리~' 죽국악의 대금과 소금소리가 연주하듯 아름다운 선율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님이 "저 아가는 주전자라도 들 수 있겠냐, 저 팔로?"
남자 친구가 답한다. "바케스도 들걸요."
남자친구는 이곳에서 서울 명문대를 어떻게 갔을까? 갑자기 의문이 생기며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으면 싶다. 하이힐을 신고 이 길을 오갈 수 있을까? 낯선 사랑채에 앉아 웅얼거리는 말소리를 방음이 전혀 없는 시골집이라 귀로 몸으로 받아내며 꿈이길 빌었다.
저 멀리 워낭소리가 구들장에 군불을 지피며 깊어감을 알린다.
30여 년을 종갓집 큰며느리 자리를 지금도 꿋꿋이 지키고 있다.
시어머님도 아직 건강하게 시골집을 지키고 계시다. 건강하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이 길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아찔하고 어지럽다. 되돌아가라고 하면 지금은 자신이 없다. 버텨낼 수 있는 힘은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언제나 내편이 되어 주었고 평생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금도 친구로 반려자로 손을 잡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