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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Apr 21. 2022

스토너만치 수줍고도 열정적인

북페어링⎜⟪스토너⟫와 ⟪아무튼, 서재⟫


갈수록 서두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일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이 요구되자 자신을 소모하고 지식을 소비하며 성장하는 길이 권장된다. 그런 열정에 비하면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의지는 수동적이다. 다소 무력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타오르는 것만이 열정은 아닐 것이다. 스토너에게 열정은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매일 아침 품이 넉넉한 정장을 갖춰 입고 산책하는 늙은 신사의 기운이 시작부터 맴돈다. 촌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보온병에 담긴 둥글레 차처럼 뭉근하다. 근래 한국에서 유행하는 SF소설과는 상반되는 작품이다. 우주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비하면 ⟪스토너⟫는 대학교와 집만 오가는 지루한 교수의 나날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겉보기에 그의 사랑은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말미에 독자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만큼 인내심이 강한 책


기묘하게도, 이 책은 윌리엄 스토너만큼 인내심이 강한 작품이다. 1965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스토너⟫를 다룬 매체는 한 곳 밖에 없었고, 이듬해 절판 되었다. 시간이 흘러 ⟨뉴욕 리뷰 북스⟩ 편집자 에드윈 프랭크는 책방 ⟨크로포드 도일⟩의 주인에게 ⟪스토너⟫라는 책이 좋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는 2006년 뉴욕에서 ⟪스토너⟫를 재발행하며 이런 문장을 달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책은 2011년 유럽에서 인기를 모아 그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스토너 본인만큼이나 강한 의지로 살아남은 이 이야기는 수줍고도 열정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카모마일 티를 홀짝이듯 '윌리엄 스토너'를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무료한 하루에도, 밀려드는 일상의 필요에도 말려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지켜야 할 자신이란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순'자가 붙은건 전부 떨궜다. 물론 눌러붙은 스티커처럼 희여멀건 자국이 남았다. 아쉬움이 컸지만,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걸 영혼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헛깨비같은 낱말보다는 지켜내고 싶은 구체적인 순간들이었다.


더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난 그래도 믿어볼거야.' 다짐했던 일. 부끄러운 마음을 제치고 데킬라 두 샷에 용기를 내서 클럽에서 막춤을 추던 날. 잘 되리라는 보장 없이 무작정 음악을 배워보기로 한 일. 억지 웃음을 짓는 날도 많았지만 그런 순간에는 흠없이 웃었다. 자의식이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면 뿅망치로 뿅뿅 때려잡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고 싶은게 많았고, 그제서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스무살 무렵부터 꾸준히 깨지며 분기별로 달라지는 자신에게 적응해야 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판단했고, 좋아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새로운 이를 만날 때면 설핏 달라졌고, 국내외 작가들의 글을 탐독하며 우리에겐 정답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무구한 빈칸은 아름다웠고, 피곤했다. 그렇게 남은건 지치지 않는 호기심일까 필사적인 다정일까. 겉보기엔 건조한 얼굴이겠다.  


두더지같은 마음으로 무작정 길을 나선다. 헤드폰을 끼고 한강을 걸으며 타인의 휴식을 엿보고 ⟨책읽아웃⟩을 들으며 작가들의 생각을 엿듣고 나서도 마음이 온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최소한 속은 편해졌다. 긴 산책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나에게는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무튼, 서재』


책이 가득하고 노련한 가죽 소파가 안치된 서재 한켠에는 어린 딸아이를 위한 작은 책상과 스탠드가 있다. 눈빛이 총명한 아이는 책에 잠긴 아빠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북쪽으로 높이 난 창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든다. 교수 스토너에게 서재는 연구를 집필하는 곳이며 딸과 뜻깊은 교류를 나누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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