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년의 영화 Nov 29. 2022

비로소 시작된 ‘동양’의 반격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마블 스튜디오 (2021) 리뷰

<샹치와  링즈의 전설>, 마블 스튜디오 (2021)

감독: 마블 스튜디오

연출: 마블 스튜디오

별점: 3.5/5

(MCU 영화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MCU 영화의 경우 연출가의 영향력 보다는 기획을 총괄하는 스튜디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라 여겨 감독 이름이 아닌 스튜디오 명의의 영화로 표기합니다.

테마파크에도 얼마든 배울 점은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두고 "시네마가 아닌 그저 테마파크일 "이라며 비판한  있다. 이는 일정 부분 인정해야  지점이라고 본인도 생각한다. 실제로 MCU 영화들은 그간 히어로의 무대로서의 세계관 확장과 관객이 즐길  있는 이벤트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해왔고 시네마의  역할인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고 현재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등한시한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디즈니 월드에서 꿈과 희망이라는 가치를 배우듯이 테마파크라고 해서 주지할 주제의식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MCU 영화 중에서도 나름대로 괜찮은 애티튜드를 가진 영화들이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인종주의를 다룬 <블랙 팬서>였고, 페미니즘 요소를 차용한 <캡틴 마블> <블랙 위도우>였다.

다만 문제는 이들의 완성도가 그리 탁월하지만은 않았다는 거였다. <블랙 팬서> 와칸다 아프리카 부족들의 신앙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이집트  바스트나 인도  하누만 등을 빌려와 오리엔탈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블랙 위도우> 이미 오래 전에 끝난 냉전 앞에서  소련 시기의 가스라이팅 조직 이야기를 하여 빌런의 동기에 대한 설득력을 잃었다. <캡틴 마블> 난민 문제와 페미니즘, 패권주의  많은 주제를 다루지만 빈약한 서사로 인해  어느 것도 제대로 전달해내지 못했다.  영화 모두  장면을 제외하면 그다지 뛰어날  없는 액션 연출을 보여준 것도 마찬가지다. 서사 역시 평이하여, 이들 영화는 어찌 보면 MCU 관점에서는 그저 다음 영화를 위해 '거쳐가야 하는'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라는 무대를 다룬 이번 영화, <샹치와  링즈의 전설> 앞선 비판들을 상쇄할 정도로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스스로 ' 하필 중국을 무대로  히어로 영화를 만들었는가' 대해 유려한 연출로 답한다. 중국 무술을 기반으로  액션 연출은 군더더기 없이 훌륭하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닌자와 수리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서구에서 제작한 동아시아 배경의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동양 고증을 보여준다. 후반부로 넘어가며 만다린과 샹치의 가족관계에 대한 서사가 지나치게 생략되어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훌륭한 애티튜드를 가진, 나쁘지 않은 영화라   있다.

그렇다면 샹치는 어떤 점에서 좋은 영화이고,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가질까. 이제부터는 초반부부터 영화를 뜯어보며  점들에 대하여 다뤄보도록 하겠다.

펜던트라는 맥거핀

MCU 영화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장치로써 맥거핀이 사용된 사례는 이미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에서의 비전과 마인드 스톤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에서의 맥거핀 활용이 극을 이끌어가며 관객을 혼동시키기 위한 근원적인 수단으로 쓰였다면, <샹치> 등장하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펜던트'라는 맥거핀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잠깐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수단으로 사용될 것처럼 영화의 시작부터 중요하게 언급된 샹치의 펜던트는 그저 만다린 가족의 재회와 어머니의 땅인 탈로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일회성 아이템으로 사용되고 끝난다. 이는 영화의 아무런 배경설명도 제시되지 않기에 영화의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는 관객들에게 일시적인 몰입감을 가져다주고, 극이 진행될 명분으로서의 개연성도 부여한다. 실제로 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하고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샹치에게 갑자기 아버지의 부하가 찾아온다는 플롯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려면 무엇이라도 그가 지켜야만 하는 오브젝트가 존재하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점에서 초반부 맥거핀의 활용은 극의 몰입감과 개연성 모두를 높이는  크게 기여했다.

'나만의 제국' 만들겠다는 선언

동생을 찾기 위해 마카오로 향한 샹치는 우여곡절 끝에 다크웹에서 중계되는 투기장의 메인 스테이지에 오르게 된다. 격투의 상대로 만나게  것이 다름아닌 그의 동생  샤링. 그는 샹치가 아버지로부터 탈출한 이후 홀로 힘을 키워 그곳을 탈출했으며, 어느덧 가장 강한 전사로서 자신만의 투기장까지 갖춘 거물이 되어 있었다. 바로  장면에서  샤링이라는 캐릭터의 핵심과도 같은 대사가 나온다. "그들의 제국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면, 나만의 제국을 세워야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던  링즈에서 나온 그는 어느덧 아버지와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인물로 변모해 있었다. 이런 성향은 복선이 되어 영화 끝까지 이어져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고 성장한 샹치와 대비되는, 샹치의 아치 에너미로 발전할 가능성을 쿠키영상에서 남긴다.

가부장제와 폭력의 각기 다른 트라우마

샹치와 샤링은 모두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이들이다. 샹치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강력하고 무자비한 살인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눈앞에서  두려움에 트라우마를 얻었다면, 샤링은 아버지와  링즈의 일원이 되지 못한  투명인간으로 남아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얻었다. 말하자면 전자는 폭력성의 트라우마, 후자는 가부장제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영화는  모두를 비중있게 다루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샹치와 샤링을 대치되는 인물로 그려낸다. 예컨대 어린 샹치와 샤링의 훈련 장면에서 샹치는 두려움에 대한 복종으로 어쩔  없이 무술 훈련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샤링은 자신 또한 샹치처럼 강해질  있다는 일념 하에 남들 몰래 스스로 훈련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어린 시절 샹치는 트라우마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고, 샤링은 반대로 그것을 이겨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면모는 영화의 결말로 들어서며 완전히 반대가 된다. 샤링이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겠다는 다소 자폐적일  있는 분리주의적 사상을 그대로 끌고 가며, 다시 자신만의  링즈를 재건하는  비해, 샹치는 두려움에 굴복하고 아버지에게 복종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스스로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죽일 기회를 포기하고 그를 설득하려 한다. 유년기에는 정체되어 있던 샹치가 오히려 성장하여 용의 품성을 가진 히어로로 거듭나고 유년기에 진취적으로 성장하던 샤링은 오히려 자신이 만든 권력에 다시금 스스로를 수감하는 정체에 빠진 것이다.

다만 샹치의 성장에 대한 묘사에 비해 샤링의 트라우마와 그것의 정체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실제로 샤링에 의한  링즈의 재건으로 이어지는  번째 쿠키영상은 아무래도 뜬금없는  같은 요소가 있었다. 오락영화의 특성상 액션 시퀀스를 넣기 위해 빠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분의 시간이라도 투자하여 샤링의 그런 감정선을 작중에서 이야기했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탈로, 유토피아와 오리엔탈리즘 사이에서

중반부 이후 영화의  무대가 되는 탈로라는 공간도 주목할만하다탈로는 전형적인 고대 중국 신화를 이미지를  유토피아와 같은 공간으로 그려진다 링즈와 달리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없고아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유익을 얻기 위해 무술을 배우며원로는 있으나 특정한 지도계급은 없는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 말이다이런 사회에서 권력만을 좇고 자신을 위해 기꺼이 남의 피를 흘리는 삶을 살았던 만다린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실제로  링즈와 탈로의 대비는 폭력적인 남성성의 부성과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모성의 이미지처럼 차용되어 영화를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비판점이 있다.  평등한 유토피아와 같은 공간은 전근대적 이미지를 가지고 신비하게 그려져야만 하는가. 심지어는 서구인들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동양의 스테레오 타입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말이다. 영화가 동양을 고증하는 면에서 탁월했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면 전형적인 동양의 이미지를 가져와 신비화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까지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동양을 신비화하기만   그것을 올바르게 구현해내는 데에도 실패했던 것에 비하면 샹치의 탈로 연출은 분명히 진보라고 말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이래야만 하는가' 대한 의구심은 남는다.

만다린의 캐릭터성

작중 만다린은 부정할  없는 악인이다. 그러나 연좌제로 인해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점이 만다린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는 점은 부정할  없다. 갱생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가정을 이룬 그는 아내의 죽음이 자신이 힘을 포기해서라고 생각하고 다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식들과 아내와 다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은 그를 다시금 신적 권능을 갖춘 존재로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의 내면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다크 드웰러의 계략에 아무런 의심없이 넘어갈 정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본작의 제작진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잠시 윤리 이야기를 해보자.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악함은 내면의 약함에 다름아니다. 마음이 약한 자는 가벼운 유혹에도 쉬이 흔들리고 선행과는 거리가  삶을 살게 된다. 악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어쩌면 만다린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과도 매우 닮아있을지 모른다. 영화의 초반 내레이션에서도 나오듯이, 그는 링의 힘을 "선한 일을 하는데   있었음에도" 권력을 탐하는 데만 이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이고, 아내를 만난 그는 갱생하여 살생과는 거리가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천여 년만의 다짐이 아내의 죽음이라는 결과로 돌아오는 순간의 분노는 그를 누구보다도 강하면서도 약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만다린이 죽어 마땅한 악인임에도 우리가 그에게 측은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비슷한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모두 죄를 짓는 이들이 아닌가. 바로  점을 깨닫기라도  듯이, 샹치는 용의 품성으로 각성한 이후 그를 죽이겠다는 기존의 생각을 접고 용서라는 성장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만다린 또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자신의 업보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앞에서 아들을 구한 , 비로소 아버지로서의 최후를 맞이한다.

물론 상기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최대한 선해하였다는 전제 하에서 논할  있는 것들이다. 사실 영화는  후반부에서 많은 미흡함을 보인다. 만다린의 감정선은 플래시백을 통해 스쳐지나가듯 표현되어 쉽게 공감하기 어렵고 샹치가 각성하게 되는 구체적 원인 역시 납득할만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해당 시퀀스들을 이어가는 시각적 장면 묘사와 이들의 대립과 화해를 다루는 액션 연출이 이를 상쇄하여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은 위안이   있겠다.

용과 드래곤의 대립, 오용되어  동양적 이미지를 향한  

혹자는 영화의 말미에 최종 빌런으로 등장한 다크 드웰러에게 박한 평가를 줄지도 모르겠다. 강함에 비해 매력도 떨어지며 만다린을 영화에서 퇴장시키는 일을 겸하여 일회성 빌런으로 소모하려고 만든 캐릭터 같다는 점이 이유일 테다. 그러나 다크 드웰러는 어찌 보면 마블 스튜디오가 작정하고 구축해낸 메타포라고도   있다. 극에 총이 등장했으면 사용되어야 한다는 체호프의  이론처럼, 샹치가 탈로의 호수 속에서 용을 만나 비로소 각성했다면  용과 함께 샹치가 대적하여 싸우는 모습은 영화에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한다. 영화는  대적자 다크 드웰러를 촉수가 가득한 끔찍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연출해  다른 주제의식을 던져낸다.

동양의 용과 서양의 드래곤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모티프의 환수라는 것은 이제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자는 신비와 신성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받는 반면 후자는 아이들의 악몽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빼앗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괴수로 여겨진다. 외양적으로도 차이가 있는데 용이 짧은 다리가 달린 거대한 뱀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면 드래곤은   공룡에 날개가 달린  같은 형상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간 서구의 대중문화는 동양의 용을 묘사하는 작업에서 항상 자기네의 괴수 형상을 끌고 오는 우를 범하는  일상이었다. 때문에 동양의 용을 진정 '동양적으로' 묘사한   되는 대중매체인 샹치에서 용의 대적자가 드래곤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다크 드웰러라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마치 지금껏 당해왔던 문화적 수모를  기회를 통해 갚아주겠다는 선언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다크 드웰러의 등장 이후  링즈와 탈로 부족민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떤가. 이들은 지난한 싸움을 순식간에 멈추고 다크 드웰러에 대항해 일시적 동맹을 맺는다. 약간의 코미디가 곁들여진  장면에 혹자는 개연성 부족을 논할지 모르나 사실  장면은 서구적 이미지의 침공에 맞선 동양적 연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올바른 이해가 가능한 대목이다. 이처럼 영화가 후반부 들어 힘을 잃고 방황한다는 세간의 혹평과는 달리 오히려 샹치는 후반부에 보다 힘을 주고 많은 것을 담으려  영화라고도   있는 것이다.

장애물 가득한 세계에서 '자신' 찾는다는 

이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주제의식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 대해 말한다.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전투에 참전해 다크 드웰러의 목을 명중한 케이티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즐겁게 무술을 배우는 탈로의 아이들, 간만에 카메오로 등장해 연기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트레버까지. 이들은 모두 세계 속에서 자신이라는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권력만을 원하지만 정작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은 가족들마저 잃은 만다린, 아버지에게 복종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 삶을 낭비하던 샹치,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자신의 제국을 짓기를 원했던 샤링. 이들 주인공들은 삶이라는 장애물에서 방황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비로소 성장한 샹치와 삶의 끝에서야 비로소 다시 아버지가  만다린은 기나긴 방황을 끝냈다. 그러나 샤링은 어떤가. 우리는 그에 대한 서사의 완결을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링즈는 어떻게 될까?

쿠키영상에서 새로운  링즈의 수장이  샤링. 그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여성도 참여할  있는 조직을 만든다. 비로소 그의 제국이 완성되는 순간인 것이다. 영화는 " 링즈는 돌아온다." 문구와 함께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이 안티히어로일지, 혹은 샹치의 빌런일지는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아직  샤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 그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는  링즈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스콜세지의 말대로 MCU '시네마'라기 보다는 하나의 '테마파크'이기 때문에나 가능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죄책감없이 빵 터트리는 수퍼빌런 피카레스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