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
감독: 조지 밀러
출연: 톰 하디, 샤를리즈 테론 외
별점: 4.5/5
핵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
시네마적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당대 현실 사회가 담고 있는 불안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 예시다. 버블 경제 시기인 1982년 개봉한 해당 작품에서 디스토피아적 을씨년스러움을 풍기는 사회의 분위기는 일본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했으며, 이민자의 물길로 정작 자국민이 일할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든 미국의 모습에 있었다. 우리가 이번에 살펴볼 작품이자 디스토피아 근미래 액션물의 상징과도 같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리부트인 본 작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시리즈에 이어 이번 리부트에서도 메가폰을 잡은 조지 밀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뚝심으로 기름때와 크롬 빛깔 가득한 근미래를 투박한 액션과 함께 높은 완성도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매드맥스3>가 개봉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 조지 밀러가 바라본 현실 세계의 디스토피아적 불안이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애티튜드를 가지고 현실의 어떤 면을 거울 삼아 새로운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창조해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초점은 '아무런 희망이 남아있지 않은 불공정한 현대 사회'에 맞춰진다. 조지 밀러가 본 작을 통해 묘사하고자 한 세계는 여성이, 청년이, 노동자가, 빈민이, 온갖 종류의 소수자가 착취당하고 그 착취당하는 이들끼리도 서로 자신이 왜, 어떻게 착취당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가스라이팅에 빠진 사회다. 단적으로 작중 초반 등장하는 시타델의 시민들은 당장 마실 물을 남들보다 많이 얻기 위해 배급 시간만 되면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달려 나가지만 정작 지하수를 독점하고 자기가 원할 때만 풀어주는 독재자 임모탄 조에 대한 적개심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그토록 오랜 가스라이팅에 세뇌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소위 말하는 '갑'에게는 따지지 못하면서 '을'끼리의 경쟁만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사회를 너무나도 닮았다.
조지 밀러가 그린 새로운 매드맥스의 세계관에서 워보이로 대변되는 청년들은 크롬색 무쇠 덩어리, 8기통 자동차, 엔진과 가솔린 등의 물신주의에 빠진 이들로 묘사된다. 또한 그들은 임모탄이 조장한 영웅심리에 빠져 스스로를 임모탄을 위해 희생한다면 발할라(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 신념에 따라 다른 이들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하청 받는다. 그야말로 사회 시스템이 근본주의적 종교 역할을 하는 사회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지점 역시 쉽게 비웃을 수는 없겠다. 우리는 여태껏 경제의 논리가, 돈과 자본이 만든 물신주의와 영웅심리에 빠져 그것을 신봉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청소년기에는 학벌과 입시에 사활을 걸어 서로 경쟁하는 법만을 배우고, 청년기에는 주식을 통해 삶이 달라지리라 믿으며, 중년 이후로는 부동산을 통한 인생 역전을 노리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때문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속 세계는, 과장된 면은 있을지언정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자화상과도 같다.
이런 혼란한 사회에 속에서도 조지 밀러가 가장 두드러지게 그 착취의 폭력성을 규정하고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여성 착취라는 부분이다. 시타델로 대변되는 사막 도시국가 사회에서 여성, 특히 가임기의 젊은 여성은 임모탄과 같은 권력자의 아내(라고 하지만 사실 노예상태에 가깝다.)로 독점되어 끝없이 대상화되고 폭력적으로 정체성을 규정당하며, 그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진다. 이런 착취는 두 갈래로 동시에 벌어지는데, 여성의 성(섹스)적인 면과 생산(출산)적인 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전자의 사례를 대변하는 것이 중반부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아내들로부터 풀어주는 정조대라는 상징이고, 후자의 사례를 대변하는 것이 마치 공장형 축산제를 연상케 하기라도 하듯이 시타델 건물 내에서 모유를 짜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이는 물론 과장된 모습이기는 하나 현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고, 다루는 모습 역시 이런 방식과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음을 조지 밀러는 말하고자 한 듯하다. 대중 매체와 미디어에서 여성은 끝없이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노동에 종사하기보다는 아이를 낳는 것이 생산적 활동으로 권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세계 각국에 남아있는 여성의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본 작,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그런 여성들의 착취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모티프를 훌륭한 액션 시퀀스와 함께 내러티브 속에 잘 녹여냈다는 점에서 한 편의 훌륭한 여성주의적 시네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본 작의 여성주의적 성과를 언급하다 보면 항상 부닥치는 비판이 있다. "어차피 이 영화는 남성인 맥스가 주인공이고 맥스의 시점으로 흘러가는 남성 중심 서사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를 반 정도만 정확히 이해한 것이다. 맥스는 물론 극의 화자이기는 하나 사실상 이 위대한 디스토피아 걸작의 주역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해방자' 퓨리오사이기 때문이다. 작중 맥스의 역할은 그 자체로 한 명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서부극의 플롯에서 주인공 일행에게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조력자의 포지션과 오히려 닮아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사회고발적 성격을 지닌 디스토피아 영화이며 동시에 사회의 변화에 대해 논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리는 사회 변화의 추동력은 극 중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서있는 두 인물의 캐릭터성 변화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워보이' 눅스와 '임모탄의 해방된 아내' 치도다. 눅스는 임모탄에게 세뇌되어 발할라로 가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려 들 정도로 물신주의, 피지배계급의 또 다른 피지배계급 착취에 익숙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눅스는 작전의 어이없는 실패로 인해 임모탄에게 버림받은 후 퓨리오사 일행의 여성 케이퍼블에게 위로받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깨닫고 퓨리오사 편에 합류한다. 반면 치도는 막상 탈출한 임모탄의 수중 밖이 너무나도 황량하고 희망 없어 보임에 절망하고 수차례나 임모탄에게 돌아가려고 시도한다. 이런 대비를 통하여 우리는 (비교적) 우위에 있는 사회계층이라 한들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행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누군가의 약자성이 그 자체로 그의 변혁성을 담보하지는 않음을 관객들에게 주지 시킨다.
이번에는 영화의 제목인 '매드'맥스의 뜻에 대해 간략하게 다뤄보자. "미친"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매드라는 수식어는 사실 맥스라는 캐릭터에게 꼭 필요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지속적으로 딸이나 주위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환각을 보고 듣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일정 부분 미쳐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가 보는 환영은 단순히 그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작중 지속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부발리니 족들을 만난 후 소금사막을 건너겠다는 퓨리오사 일행의 계획을 들은 후 그의 환영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맥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전까지 그의 환영이 난데없이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생각이나 행동을 못하고 얼어붙게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면 소금사막을 향해 떠나는 퓨리오사 일행을 바라보는 맥스 앞에 나타난 "구해줘요."라는 환청은 마치 '그들을 놓치지 말고 베풀 수 있는 선의를 베풀어요'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왜 자신을 구하지 못했냐는 원망 어린 환각이 퓨리오사 일행을 만난 후 과오에 대한 속죄와 또 하나의 기회와 같은 맥락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런 그의 환각은 사실상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양심'을 은유하는 듯하다. 양심이 멸종하고 모두가 미친 게 정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 홀로 양심을 가지고 있는 맥스라는 인물은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역시나 선의를 가진 인물들인 퓨리오사와 일행이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고 시타델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미칠 이유가 없어진 맥스이기에, 그의 환각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시간을 잠시 되돌려 퓨리오사가 부발리니 족들과 재회하기 직전으로 돌아가 보자. 녹색의 땅에 살던 여성 공동체. 이들은 임모탄과 시타델로 대변되는 기존의 사회와 대척점에 있는 대안적인 사회로 보인다. 전자가 죽음의 편이었다면 후자는 생명의 편인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영화들이 이러한 대비되는 세력과의 조우를 통한 해피엔드라는 선택지를 많이 이용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대안적인 공동체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조지 밀러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던 듯하다. 아무리 기존의 사회가 혼란스럽고 지옥 같을지언정 그 안티테제 격인 대안적 사회로 도피한다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기존의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을 수많은 민중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대안적 공동체 역시 언제 삭막하게 변화할지 모르는 탓이다. 실제로 작중 녹색의 땅은 어느 순간 농사가 불가능한 황무지가 되어버렸고 까마귀 떼가 점령한 황량한 땅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 희망 없고 앞길이 막막한 사회에서 퓨리오사와 맥스 일행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
영화는 매우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방식으로 답을 내린다. "돌아가자." 물과 농작물이 있고 자신들과 같은 해방을 기다리는 수많은 민중들이 있는 '대도시' 시타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 변화를 이끄는 것은 도피가 아닌 투쟁과 계급의 전복이다. 영화는 그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 시간 반 여를 달려왔고 끝내 마지막 전투를 통해 그것을 달성해낸다. 변화는 우리가 스스로의 상황과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도피가 아닌 투쟁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 롤이 올라가기 전 표기되는 자막은 영화의 주제를 그대로 꿰뚫고 있다.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앞서 본 작의 인물들이 자신들 간의 경쟁에 내몰려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인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다고 논한 바 있다. 어쩌면 퓨리오사도 그랬던 것일지 모른다. 지옥 같은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그것과 직접 맞서 싸우기보다는 다른 사회로의 도피만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안티테제는 정테제와 투쟁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