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년의 영화 Dec 07. 2022

판타지 세계의 중심에서 장르의 심연을 직시하다

<판의 미로>, 기예르모 델 토로 (2006)

판의 미로 (2006)

감독: 기예르모  토로

출연: 이바나 바쿠에로, 더그 존스, 세르지 로페즈, 아리아드나  

별점: 4.5/5

1944 스페인, 내전은 끝났지만 숲으로 숨은 파르티잔들은 파시스트 정권에 계속해서 저항했고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이 곳곳에 배치된다. ‘오필리아 만삭의 엄마 ‘카르멘 함께 새아버지 ‘비달대위가 있는   기지로 거처를 옮긴다. 정부군 소속으로 냉정하고 무서운 비달 대위를 비롯해 모든 것이 낯설어 두려움을 느끼던 오필리아는 어느   속에서 숨겨진 미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산이고 숲이자 이라 소개하는 기괴한 모습의 요정 ‘ 만난다. 오필리아를 반갑게 맞이한 판은, 그녀가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이며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가지 임무를 끝내면 돌아갈  있다고 알려주면서 미래를   있는 “선택의  건넨다. 오필리아는 전쟁보다  무서운 현실 속에서 인간 세계를 떠나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데


근대적 판타지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톨킨은 판타지라는 장르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 왜곡이다." 실제로 판타지라는 대중문화 장르 속에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없는 비일상적, 비전형적 사건들이 즐비하고 그런 신비성이  판타지의 중요한 요소라고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이러한 신비성 탓에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들의 장르라는 인식이 대중들 사이에 굳게 뿌리 박혀 버린  역시 사실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판타지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를 원하는 겁쟁이들의 장르라고 말한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가지고 오는 작품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이다. (물론  작품이 실제로 현실 도피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이세계로 도망친  남매의 성장기라니, 얼핏 들어서는 충분히 현실 도피적인 플롯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번에 살펴볼 작품, <판의 미로> 카메라를 판타지 세계의 중심에 놓고 그런 판타지라는 장르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특이한 작품이다. 그간 판타지가 챙기지 못하거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던 현실적, 사회적 문제를 판타지라는 장르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또한  작품은 여러 면에서 영리한 선택을 하는데 단순히 현실의 왜곡과 신비성을 통한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  자체를 바라보는 장치로써 환상을 이용한 점이 그렇다. 작중 오필리아는 요정들이 이끌고 가는 '판의 미로' 대변되는 수차례의 환상을 본다 환상이 현실의 이야기들과 차례로 겹치는 것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는 전개된다. 여기에서부터 관객들은  영화가 흔히 생각하는 다른 판타지 장르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오필리아가 겪는 것이 실제 판타지 세계인지 아니면 그저 본인의 환각일 뿐인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후반부 오필리아와 대화하는 판이 비달 대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장면이다.

그러나 작중 드러나는 판타지 세계가 실제인지 환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초점은 그런 환상적 요소를 통해 드러내고자  현실의 이야기에 맞춰진다. 작중 배경이 되는 1944 스페인,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탈취하고 남은 공화파 파르티잔들이 숲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치던 현실의 역사 말이다. 영화는 파시스트 정권의 대위인 비달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비달이 지내는  속의 진지로 이사 오는 소녀 오필리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당대 정권의 진지가 있는  인근이라면 늘상 그랬듯이  근처에도 게릴라전을 펼치려는 파르티잔들이 숨어있었다. 오필리아가 신화적 존재인 '' 만나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린 모안나 공주의 환생이며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동시에 파시스트들과 파르티잔의 서로를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둘을 조명하는 카메라에 각각 겹쳐 온다. 이러한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궁극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안티-파시즘적 가치관과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한 오필리아와 파르티잔 모두의 성장에 있다.

이러한 영화 초반부의 연출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환상과 현실 사이의 대구를 이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첫째 열쇠를 얻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는 오필리아와  속의 반란군을 찾는 비달 대위의 모습이 대비되는 것이  번째다. 이후로는 열쇠 상자를 열어 전리품인 단도를 찾는 오필리아와 식료품 창고 열쇠를 두고 벌어지는 파시스트와 숨은 파르티잔 조력자들 간의 갈등이 대구를 이루기도 한다. 이런 대구를 통해 기예르모  토로는 판타지란 현실의 왜곡이지만  왜곡된  역시 지극히 현실과 닮아있음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려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오필리아라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작중 초반부  속으로  이사  오필리아는 거대한 대벌레를 보고 요정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영락없는 동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영화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대벌레가 실제로 오필리아를 도우러  요정이었음이 드러난 이후로도 오필리아의 그러한 캐릭터성은 변하지 않는다. 나무를 괴롭히는 거대한 두꺼비를 소탕하는 첫째 시험을 통과하기까지도 오필리아가 시험을 치르는 이유는 지하세계의 신비성에 대한 어떤 믿음이 있어서라거나 구원 등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파시스트들이 점령한 지옥 같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에 있을 뿐이다. 오필리아가  번째 시험에서 금기를 어기고 포도알  개를 따먹고 마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 된다. 아직까지 그에게는 지하세계로의 복귀,  구원에 대한 당위성이라고  것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이 동화  공주와 같은 특별한 인물이 되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비슷한 미성숙이 게릴라전을 펼치는 파르티잔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필리아가 먹은 포도알  알과 파르티잔에 협력하는 의사가 놓친 페니실린  정은 하나의 상징으로 엮이기 충분해 보인다. 오필리아가 특별한 당위성 없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시험을 행했고,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시기까지의 파르티잔들 역시 인본주의적 당위성과 인간의 선의에 따라 파시스트들에 대적했다기보다는 개인적 복수나 원한 등의 이유로 게릴라전을 펼쳐  것이라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실제로 그러한 대목은 별다른 대안 없이 진지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역공 당해 크나큰 인명 피해를 입는 이들의 무모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토로 또한 이런 지점을 의식한 듯하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런 오필리아와 파르티잔들이 성장하는 계기를 그려내는 성장 드라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번째 임무에서의 실패로 인해  번의 기회를 잃은 오필리아는 마지막 기회를 통해 얻은  번째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처음으로 자신의 임무에 "?"라는 질문을 한다.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태어난 동생의 피가 필요하다는 판의 물음에 의문이  것이다사실 그렇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사고방식은 파시스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해방과 구원을 찾는 과정에서도 그런 파시스트적 사고방식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해방이라 부를  있을까? 오필리아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두고 보는 대신 비달 대위에게 스스로를 희생한다. 이러한 희생의 모티프는 파르티잔에게 협력하던 의사가 죽기  마지막으로 뱉은 , "아무런 의문 없이 명령에만 복종하는  당신 같은 족속들이나 하는 짓이요." 겹쳐져 한층 아련하게 들려온다.

오필리아에 가려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는 파르티잔들의 성장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그들은 끔찍한 고문과 계속되는 검열에도 굴하지 않고 인간의 기본적 가치 수호와 선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이런 희생들은 점차 많은 이들을 감화시켜 끝내 자신들에게 동조하는 수많은 동조자들을 이끌고 미로에서 나온 비달 대위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또한 비달에게  낳은 아이를 건네받으며 그들이 내뱉는 대사가 압권이다. " 아이는 네가 죽은 시간은 물론이고,  이름이 뭔지도 모른 채로 자랄 거야." 이는 이후 태어날 아이들에게는 이런 추악한 세상을  이상 보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자기희생의 연쇄 끝에, 파르티잔은 파시스트를 상대로 승리하고 오필리아는 비록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것이 환각이든 실재이든 간에) 지하세계의 왕국으로 복귀하여 왕좌에 앉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짓는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특기할 점이  가지 있다. 작중 등장하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라는 캐릭터에 대한 것이다. 그는 현실은 냉혹한 곳이라 말하며 동화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라면서. 그러나 그런 이유로 오필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맨드레이크 뿌리를 벽난로에 태워버린 그는 자신의  태도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장면은 어쩌면  토로가 우리에게 하고픈 중요한 이야기  하나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이토록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가해자들, 예컨대 파시스트들의 탓이 가장 크겠지만 인류로서의 희망과 선의를 저버린 이들이 져야  책임 역시 있다는 은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필리아가, 파르티잔이 받은 구원에 대하여 논해보자.  토로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는 이미지를 '죽어야만   있는 천국'이라는 맥락으로 전복해 이야기를 끝맺는다. 여기에서 죽음이란 구원을 위해 불가피한 누군가의 희생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오랜 격언처럼, 자기희생은 세상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  토로는 이를 판타지라는 장르의 영역 속에서 담아내는  성공한다. 그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거나 체념하는 영화를 만들지도, 아니면 환상의 세계로 건너가 현실을 도피하는 영화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오히려 끝까지 균형을 유지하며 당대 사회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질문이 얼마나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있겠으나 적어도 필자는 같은 맥락에서  영화가  시대에  필요한 판타지 영화   편이라고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희망 없는 시대를 떠돌고 있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