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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Mar 08. 2023

세카이계를 벗어나 세계로 향하는 문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2022) 리뷰

“이 근처에 폐허 없니? 문을 찾고 있어” 규슈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 ‘스즈메’는 문을 찾아 여행 중인 청년 ‘소타’를 만난다. 그의 뒤를 쫓아 산속 폐허에서 발견한 낡은 문. ‘스즈메’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자 마을에 재난의 위기가 닥쳐오고 가문 대대로 문 너머의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를 도와 간신히 문을 닫는다. “닫아야만 하잖아요, 여기를!” 재난을 막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수수께끼의 고양이 ‘다이진’이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꿔 버리고 일본 각지의 폐허에 재난을 부르는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꿈이 아니었어”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 재난을 막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며 필사적으로 문을 닫아가던 중 어릴 적 고향에 닿은 ‘스즈메’는 잊고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fwaPK3lSQEE

아래 리뷰는 백년의 영화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변화를 꾀하는 창작자에게 있어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밟아온 커리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면서 효과적인 선택도 없을 겁니다. 실패한다면 이전까지의 작품들마저 저평가당할 수 있지만 변화의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해낸다면 작품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기 때문이죠. 감독으로 말하자면 에드가 라이트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겁니다. 6070 대중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적극적으로 작품 내에서 드러내며 필모그래피 내내 그 시대의 노스탤지어를 활용한 영화를 찍던 그는 2021년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통해 변화를 꾀합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왔던 60년대 런던이라는 시공간을 “가스라이팅의 시대”로 정의하고 노스탤지어에 빠져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을 유아기적 퇴행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그 시대에서 소외되었을 여성에 대한 서사를 성공적으로 전유해냅니다.


한편 감독이 아닌 작품으로써 이전까지의 성공을 부정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 사례로는 <007 스카이폴>을 들 수 있을 겁니다. 007의 60주년 기념작으로 개봉한 해당 작품은 냉전 시대의 산물로 등장한 스파이 무비의 한계를 직시하고, 냉전의 종식 이후 달라진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건네며 기존의 서사를 완전히 탈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이전까지 시리즈들이 보여 줬던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며 세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첩보물로서의 007 프랜차이즈 자체는 계속되어야 함을 역설하죠.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인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이런 자기부정과 성장의 변증법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보여주었던 재난 서사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작품은 소재와는 달리 주제의식에 있어서는 그간 신카이 마코토가 발을 딛고 서있던 일본 아니메 특유의 세카이계 서사와 구원에 대한 낙관을 당당히 포기합니다. 대신 재난 이후 사람들의 현실로 눈을 돌려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재난의 상흔을 안고 있는 현장을 하나하나 방문하며 그들에게 애도와 위로를 전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신카이 마코토는 비록 자신의 근간이 아니메에 있을지언정 이제 자신이 나아가야 할 자리는 시네마에 있음을 확실히 합니다. 구원을 위한 도피처로서의 ‘세카이계’를 버리는 대신,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모두가 제 자리에서 제 할일을 하는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신카이 마코토를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니라 ‘영화 감독’으로서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으로 무너졌던 폐허마다 또 다른 재난을 일으키는 문이 있고 그게 열리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설정의 이야기입니다. 문의 열림을 막는 것은 토지시라는 존재들인데 그들은 과거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재난의 상황을 다시 보고 들으며 그 상황 속 이들을 위로함으로써 새롭게 들이닥칠 재난을 막아냅니다. 한편 문이 열리는 걸 막아주는 존재로서 일본에는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의 요석이 꽂혀 있습니다. 영화는 규슈에 꽂혀있던 요석을 우연히 발견한 스즈메가 뽑아버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석은 깨어나 고양이 정령 ‘다이진’이 되고 그런 다이진을 단순한 고양이로 여긴 스즈메는 그에게 “우리집 아이가 되지 않을래?”라며 묻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다이진은 요석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저버립니다. 대신 그곳의 재난을 막으러 온 토지시인 소타에게 저주를 걸어 그를 스즈메 어머니의 유품인 의자에 가둬버리죠. 소타에게 호감을 품게 된 스즈메는 함께 다이진을 찾아 헤매며 수 차례 문을 닫고 재난을 막아냅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재난이 벌어졌던 공간들을 방문해 그들에게 애도를 전합니다. 그곳에서 재난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던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고 말이죠.


영화의 초중반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이 로드무비의 과정은 어찌 보면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비슷한 흐름의 반복입니다. 이야기의 프롤로그가 되는 규슈에서 쓰나미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방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코쿠에서는 산사태로 폐허가 된 지역을, 고베에서는 쇠락으로 버려진 놀이동산을 방문하는 이들의 여정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 열도 내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재난들을 연상케 합니다. 이들이 만나는 사람들부터가 그래요. 시코쿠에서 만난 치카는 산사태로 폐허가 된 중학교 출신이고 고베에서 만난 루미는 버려진 놀이동산에 대한 서글픔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여행의 출발지인 규슈의 버려진 마을은 스즈메가 스스로 성장하며 봐왔던 공간이고요. 이처럼 세 번의 문단속과 위로 방문을 반복하면서 영화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재난으로부터의 애도에 맞춰져 있음을 확실히 합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고 무대가 도쿄로 옮겨 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미 서쪽 규슈의 요석이 깨진 상태에서 도쿄에 도달한 스즈메와 소타 일행은 남은 하나인 도쿄에 꽂힌 요석마저 파괴되는 걸 목격하게 되는데요. 두 개의 요석이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영화 속 세계는 재난을 일으키는 미지의 힘인 미미즈의 본체가 도쿄를 덮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100년 전에 일어났었다고 언급되죠. 이 100년 전의 사건이 정말 중요한데요. 정황상 이 사건은 1923년 발생했던 관동대지진을 뜻합니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상자가 40만 명에 달했던 이 대지진은 분명 20세기 이후 일본이 겪은 최악의 재난입니다. 그러나 진짜 재난은 따로 있었습니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내각은 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고자 지진의 배후에 조선인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재일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최소 2천 명, 최대 6천 명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당했는데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어렴풋하게 모종의 특이점을 눈치채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말하는 재난이란 단순히 자연에 의한 천재지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과오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재앙을 포함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이쯤에서 우리는 미미즈와 요석이 영화 속에서 은유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난을 일으키는 미지의 힘인 미미즈는 인간이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고, 선이나 악과 같은 윤리적 잣대로는 파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실 당연한 얘기죠. 재난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자연재해는 우리가 막으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조심한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요석은 다릅니다. 요석은 인간이 미미즈가 존재하는 곳에 꽂아 넣음으로써 미미즈를 억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건 어찌 보면 지극히 인위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유추해보건대 요석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지켜야 할 자연과의 관계성을 은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해 자체는 막을 수 없을지언정 인간이 최소한 자연과 관계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킨다면 그 결과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는 있으니까요. 요석이 모두 사라져버린 채 벌어진 재난의 사례가 100년 전의 관동대지진이었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재해로 인한 인명피해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후 재해의 원인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며 벌어진 2차적 재난은 인간이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고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벌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재난 앞에서 소외된 이들을 단순히 위로하는 작업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나지 않아도 됐지만 인간의 잘못된 욕망으로 인해 벌어져버린 재난을 비판하는 데에도 앞장 설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전까지의 신카이 마코토 영화와는 크게 궤를 달리합니다. 신카이 마코토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이 겪은 트라우마와 PTSD를 이용한 서사를 지속적으로 다루었지만 그걸 영화적인 시선으로 현실과 결부시키려 시도한 적은 없는 감독이었습니다. 예컨대 본격적으로 재난을 주된 테마로 다루기 시작한 <너의 이름은.>에서 소행성 충돌이라는 재난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적이라는 구원을 통해 지워져 버립니다. 한편 영원히 멎지 않는 호우라는 재난을 다루는 <날씨의 아이>에서 재난은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세카이계적 선언에 의해 소비적으로 다루어지죠.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그는 이제 실제의 재난을 당당히 영화 속으로 소환해내고 그걸 기억하고 애도하며, 한편으로는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재난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를 표해야 한다고 선언하고자 합니다. 그가 서브컬쳐 애니메이션 감독에서 시네마를 생산하는 영화 감독이 되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죠.


그렇다면 그가 논하는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재난은, 요석이 뽑혀버렸다는 영화 속 서사가 은유하는 자연과의 관계성 파기는 어떤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대상화와 파괴입니다. 동일본의 간토 지방에 들어서고 스즈메의 어머니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오늘날 일본인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인 동일본 대지진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12년 전의 그 사건으로 언급되고 스즈메가 4살 때 발생했던 재난인 3.11 동일본 대지진은 지진과 쓰나미 자체가 불러온 피해보다도 더 큰 2차적 피해를 안고 온 재난이었습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 피폭이었죠. 1차적 재난인 지진과 쓰나미는 물론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였지만 원전 피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자력 발전의 매뉴얼을 잘 지켰다면, 관련자들이 보다 책임감있게 사후 대책을 마련했다면 충분히 실제보다 크게 줄일 수 있는 사건이었죠. 다른 재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서는 시코쿠에서의 산사태와 규슈에서의 마을 침수를 이야기하는데 두 재난 모두 벌목과 댐 증축 등 인간의 자연 파괴로 인해 급증하고 있는 재난임을 부정할 수 없죠. 이 모든 인간들의 자연 파괴가 바로 미미즈를 앞에 둔 요석 파괴로 은유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한 번 돌아가봅시다. 스즈메는 고양이 정령 다이진을 처음 보고 별 생각 없이 그에게 “우리집 아이가 될래?”라고 묻는데 그 한 마디에 다이진은 요석으로서의 책임감을 포기하고 스즈메에게 종속되고자 합니다. 이게 뭘 의미할까요? 저는 자연의 질서를 인간이 종속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은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소타라는 인간의 희생으로 이어지겠죠. 영화의 중후반부에 소타는 요석 역할을 하던 다이진 대신 자신이 요석이 되어 재난을 막아내야 함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보며 마치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피폭된 방사능을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던 자원봉사자들이 떠올라 자꾸만 서글퍼졌습니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는 이런 인간의 자연 파괴와 대상화 앞에서도 희망이 존재함을 끝내 논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예 무대를 대지진의 피해를 그대로 받은 마을로 옮겨 모든 시간축이 동시에 존재하는 저세상으로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보냅니다. 그곳에서 비로소 다이진과 사다이진이라는 두 요석들은 “살고 싶다”는 소타의 절규가 스즈메에게 닿는 것을, 그 “살고 싶다”는 목소리가 “함께 살자”는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고서야 제 자리를 찾고 다시 미미즈를 봉인해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스즈메의 문단속>은 인간과 자연이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임감 없이 다이진을 종속하려던 스즈메와는 달리 사다이진의 주체성을 존중하던 소타의 할아버지처럼,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선을 지킬 때 비로소 공존할 수 있으니까요.


이로써 세계가 제 자리를 찾고 재난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이들을 응원함으로써, 그리고 일어나지 않아도 될 재난이 더는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함으로써 <스즈메의 문단속>은 마무리됩니다. 제게는 무엇보다도 신카이 마코토가 더는 ‘자신만의 세계’로의 도피를 택하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해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뜻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소외’란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를 대상화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 해결책은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하지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정말이지 따스한 성장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곁가지로 새고 싶은 대목이 있는데요. 제가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한 점은 이 영화가 여성 인물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아예 여성주의 영화라도 말해도 될 정도로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인데요. 중요한 것은 이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지고 소외된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미혼인 상태로 언니의 아이를 홀로 데려와 키운 스즈메의 이모와 반대로 이모와 단 둘이서 성장한 스즈메는 물론이고 그런 스즈메의 어머니 역시 남편 없이 홀로 스즈메를 키웠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홀로 주점을 운영하며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루미, 그리고 가족의 일을 도우며 고등학생의 나이로 민박집을 운영하는 치카 같은 캐릭터도 있죠. 이런 식으로 어떤 면에서는 주체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소외된 여성 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킴으로써 신카이 마코토는 재난 앞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대주제 외에도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인물들이 자립하여 세계를 살아가는 과정에 대한 소주제 역시 던져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죠. 소외라는 개념 자체가 큰 대비에서도, 작은 대비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개념이니까요. 자연을 소외하는 인간과 여성을 소외하는 남성, 약자를 소외하는 강자와 같은 개념들은 결국 모두 같은 도식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모든 종류의 소외에 반대하며 지속적으로 불의한 현실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상처로부터 도망치고 괜찮을 거라 낙관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현실에 보다 필요한 것은 받은 상처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을 통한 신카이 마코토의 성장을 저는 응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도망치는 것으로부터 구원을 찾던 세카이계의 계승자 신카이 마코토가 이런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제게는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이제 “나만을 위한 세계”를 넘어 “모두를 위한 세계”를 만들어냈으니까요. 이제는 그의 세계가 그 자체로 완전하기보다는 미숙할지언정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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