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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Jul 12. 2023

천문학적 음모론과 크툴루의 부름

'코즈믹'하고 '호러블' 한 이야기

386은 21세기 한반도 이남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천동설 지지자들이다. 그들의 세계가 오직 자신들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탓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상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은 20대 학생 운동권 시절을 거쳐 30대가 되는 순간부터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60이 다 된 지금까지도 사회의 압도적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남한의 모든 ‘세대’는 그들을 중심으로 꾸려진다. 가운데의 386과 양쪽 사이드의 ‘틀딱’ 혹은 ‘요즘 것들’로 말이다.


386은 자신들의 의도 이외의 것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경험해 본 일이 없다. 자신들의 손으로 군부를 무너뜨렸고 6공화국을 설립했으며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역사는? 적어도 386 당사자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90년대 말 자유주의 정권의 획득 이후로 쓰인 모든 역사는 그들에게 있어 모조리 목적론적이다. 정권을 도로 빼앗긴 2007년의 사건, 그리고 자신들의 아이콘을 잃은 2009년의 사건은 2017년의 촛불을 더욱 밝게 비추기 위해 21세기 남한에서 새롭게 쓰인 출애굽 이야기가 될 따름이다. 이들의 자기 중심성과 오만은 불가항력에 대한 경외감 혹은 불안감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크툴루조차 길들여 타코야키로 만들어 먹으려는 작자들이다.

  

나는 이들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최근 본 두 편의 영화를 떠올리고는 했다. <놉>과 <바빌론>이었다. 조던 필의 <놉>에서 주연인 OJ와 엠은 코즈믹 호러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미지의 외계생명체 ‘진 재킷’을 길들이고 그것을 촬영함으로써 한계를 초월하고자 한다. 데미언 셔젤의 <바빌론>에서 주연이자 영화제작자인 매니는 동료이자 친구인 배우 콘래드와 넬리를 모두 영화의 광기 속에서 잃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끝까지 옹호하며 “하늘에 닿고 싶었을 뿐인” 모든 예술가들의 심리를 항변하려 든다. 두 편의 영화는 인간이 한계를 넘어서며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한계를 초월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패기롭다. 그러나 이런 초월에 대한 열망은 딱 우주의 중심이 곧 자신들이 서있는 장소라고 믿었던 과거의 시대정신만큼 불경하고 오만하다. 오직 그들이 고려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며 나머지의 것들은 곁가지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놉>이 서부극 서사를 끌어들여 그걸 흑인 중심적으로 전복하려 드는 지점을 보자. 이 영화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폭력적인 기성 영화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겠다는 지점까지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런 지적은 기성 영화계의 권력 구조 자체를 폐기한다는 발상까지 이어지지 못하며 그저 ‘백인이 앉았던 권좌에 이젠 흑인을 앉힐 차례’라는 구호로 소비되고 만다. 또한 <바빌론>에서 드러나는 예술을 통한 초월이라는 개념 역시 다른 면에서 문제적이다. 자신들이 벌인 광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늘에 닿기 위한 노력”만은 폄하하지 말아 달라는 영화 말미의 선언 앞에서 그 광기 속에 희생된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존재는 지워져버리고 만다.

  

이들의 오만 섞인 열정은 나이를 먹으면서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386 세대의 뒤늦은 사춘기를 닮았다. 자신들의 선‘의’가 곧 세계의 ‘선’으로 이어지리라 확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만히 서있는 자신들 앞으로 우주가 알아서 돌아가리라 믿었던 천동설 지지자들처럼, 오만과 자기 중심성은 세계에 대한 오해만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필요한 처방은 아주 간단할 것이다. 딱 오만을 짓누를 정도의 경외감을 줄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코즈믹 ‘호러’ 말이다.

 

386이 천동설 지지자들이라면 오늘날 윗 세대에 의해 MZ로 묶이게 되는 청년 세대는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지구공동설 지지자들이다. 요즘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누구네 말처럼. 그들은 지구를 탐험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우주를 탐험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니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이란 기껏해야 자신이 올라설 수 없는 세계의 중심부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일 뿐이다. 386의 심리가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불경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 MZ의 심리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불경하다. 그들은 단 한순간도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했던 탓에 오히려 실재하는 세계 자체에 무관심해져 버렸다. 20대와 30대, 40대를 포괄하는 MZ라는 무책임한 범주화만큼이나 그들은 어떤 세대에서도 주체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데도 실패했다. 또한 아날로그에도, 디지털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 가져다주는 과도기적 경향 역시 이들에게 고충을 가져다준다. 주류 세대가 경외감의 부재로 말미암은 오만의 세대라면 이들은 경외감의 과잉이 야기한 분노와 불만의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수수께끼 같은 세계를 살아가며 끝없이 불안하고 분노하지만 그 원인은 일찍이 갈 곳을 잃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남겨지는 선택지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등지고 세계 외부로 떠나는 길일뿐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 해미가 그러했듯이, 데이빗 로버트 밋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샘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버닝>에서 갈 곳 잃은 청년들이 자신을 정의받기 위한 선택지가 존재의 긍정이 아니라 부재의 부정을 통한 외세계로의 도피인 것처럼,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샘이 세계를 실재가 아닌 허상의 아이콘으로 이해하며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처럼 그들에게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중심부에 오를 수 없는 실재 세계가 아닌 적어도 박제된 관념으로라도 몸을 누일 자리가 보장되는 영적 지식의 세계가 된다.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 틱톡으로 대변되는 짧은 포맷의 스마트폰 영상들은 이들의 도피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왜곡된 상을 추종하며 그것을 스마트폰 화면에 박제시켜 영원히 남고자 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실재 없는 관념 역시 영원과는 거리가 멀다. 즉 실재에 대한 공포심으로부터 도망친 MZ에게 남겨지는 것은 언제 잊힐지 모를 알고리즘의 바다일 뿐이다.

  

이런 MZ에게 필요한 처방은 386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매우 간단해진다. 386에게 필요한 게 현실 너머를 지각하기 위한 경외감이었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는, 현실을 지각하기 위한 경외감이다. 공포심 뒤편으로 도망치지 않으며 오히려 실재를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딱 적절한 수준의 ‘코즈믹’ 호러 말이다.

 

오늘날의 남한은 두 가지 다른 결의 천문학 음모론자들의 세계다. 세계의 노른자만을 차지해 왔던 내부인들도,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외부인들도 결국 세계를 구원할 답은 되지 못한다. 집단적으로 독백할 뿐 결코 소통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계 속에서 오해와 불통은 ‘원죄’가 된다. ‘마음’이 ‘심장’으로 오역되는 <헤어질 결심> 속 박찬욱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두 인간의 소통이란 자신을 도운 인간에게 까마귀의 시체로 보은 하는 고양이의 소통처럼 부질없을 뿐이다. 내부인과 이방인, 주류와 비주류, 중심이 되는 자와 소외되는 자는 그렇게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문쥬의 <R.M.N>이 특유의 서늘한 결말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서로 상대측이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라 확신하는 단절된 세계에서 결국 세계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는 제삼자에 의해 파괴될 따름이다. 크리스티안 문쥬는 해당 영화의 제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의 ‘방사선 사진’을 찍어 보이고 싶었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이는 어찌 보면 작금의 현실 앞에서 가장 필요했을지도 모를 대답일 것이다. 외피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방사선 사진처럼, 지금 이 땅에는 서로 다른 모든 이들을 내면적으로 엮어줄 어떤 거대한 가치가 필요하다. 모두를 하나로 엮어 줄 경외감과 경건함 말이다. 적당히 물질적이며 적당히 정신적인 것. 그리고 적당히 ‘코즈믹’하며 적당히 ‘호러블’ 한 것.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SF소설 <최후의 질문>은 인류의 보잘것없는 역사와 기술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우주적 진리를 향한 여정을 다룬다. 소설의 서두에 등장하는 2061년의 두 관리자들은 우주의 엔트로피 역전 방법에 대해 AC(아날로그 컴퓨터)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AC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문은 우주의 모든 지적 생명체들이 (엔트로피라는 당연한 법칙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AC의 서버에 끝까지 남은 ‘최후의 질문’이 되었다. AC는 그 질문을 답하기 위해 이제는 암흑밖에 남지 않은 우주 전체의 자료를 끝까지 모아 나간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진리를 깨닫게 된 AC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우주적 존재와 미지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코즈믹 호러는 모든 지적 생명체라면 당연하게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다. 그러나 그것은 경외감과 경건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포이며 동시에 희망이 된다. 즉, 그것은 희망이 부재한 세대에게 주어질 공포이며 공포가 부재한 세대에게 주어질 희망이다. 천문학적 음모론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문제적인 두 세대에게 필요한 대안은 결국 일찍이 러브크래프트가 썼듯이 ‘크툴루의 부름’인 것이다.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는 9. 11 테러 이후의 심경을 담은 SF 영화 <우주전쟁>을 세상에 내놓는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믿을 만큼 오만했던 당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역사상 첫 본토의 침공이라는 사건을 겪은 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이야기였을 따름이다. <우주전쟁>이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인류가 일방적으로 외계인 트라이포드에게 학살당하기만 하던 이 영화는 허무하게도 지구의 미생물에 적응하지 못한 트라이포드가 자멸하며 ‘운 좋게’ 살아남은 인류를 비추고 마무리된다. 혹자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일 줄 알았던 트라이포드가 자멸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코즈믹 호러에 관한 이야기로 보지 않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주전쟁>은 결국 그토록 거대하고 강인하던 트라이포드조차 예상치 못할 정도로 거대한 ‘우주적 질서’에 관한 영화인 탓이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게 우리의 과오로 인한 것일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하고 번영한다면 그게 우리의 공 때문이 아님은 확실하다. 마치 트라이포드로부터 인류가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경건함과 경외감을 가질 것을 끝없이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그리스도교조차 일면 코즈믹 호러적이다. 어쩌면 코즈믹 호러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할리우드발 대중문화의 기수로서 인간에 대한 신뢰로 무장한 영화를 만들어왔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봤을 때 <우주전쟁>이란 작품은 분명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지극히 ‘복음’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수십 차례의 번개가 같은 땅에 내리 꽂혔고 학살자 혹은 구원자, 공포 혹은 희망이 지구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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