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성해방 마고숲밭 농사 일지 : 땅 물 바람 햇빛 씨앗의 기록
지난 두 달 동안 네 번의 새해를 맞이했다. 동짓날 팥죽을 나누어 먹으며 처음으로, 1월 1일 해돋이를 본다고 눈곱 낀 눈으로 뒷산을 오르며, 명절을 맞아 부모님을 찾아뵈었던 설날에도, 풍물 소리와 함께 숲을 한 바퀴 돌며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드렸던 정월대보름에도 새해 복을 빌었다. 농한기 내내 친구와 동료, 가족을 두루두루 만나 새해 인사를 전했던 샘이다. 돌이켜보면 그 자리들은 서로의 지난 안부와 안녕을 비는 작은 돌봄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임오년이 시작됐다. <여성해방 마고숲밭 농한기 세미나>에서 만난 친구들과 각자의 기원을 담아 입춘첩을 써붙이고, 생태 뒷간의 묵은 오줌을 밭에 뿌리고, 부럼을 깨먹고, 요란하게 풍물을 쳤다. 보리싹을 뽑아 점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뿌리가 많을 수록 좋다던데, 제법 뿌리가 복슬복슬한 게 풍년이라 말해주는 듯싶었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한바탕 놀이가 끝나자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씨앗을 정리하고, 작부 계획을 세울 시간이다. 여느 농부들이 그렇듯,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심을지 정해야 한다. 여성해방 마고숲밭은 숲밭이다. 퍼머컬쳐 원리에 따라 숲의 생태계를 모방하여 각기 다른 일곱 층으로 구성된(대/소교목, 관목, 초본, 지피식물, 덩굴, 뿌리) 정원이자 밭이자 숲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러려면, 교목을 중심으로 길드를 구성하고 다년생 작물을 어쩌고 저쩌고... 그렇다. 무슨 70평 규모의 밭 작부 계획이 7천 평 농업단지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게다가, 작년에 처음 밭을 만들었을 때 다년생 작물을 거의 심지 못했던 탓에 심어야 할 것들이 더 많다. 교목 중심의 길드는 이미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무들 탓에 거진 포기했다. 저절로 자라나고 서로가 돌본다는 숲밭인데, 우리는 어쩐지 모양새만 숲에 있는 밭이다.
그래도 했다. 작년에 채종한 토종/대물림 씨앗들, 곡성과 합천에서 농사짓는 친구들이 나누어준 씨앗을 엑셀 시트에 빼곡히 정리하니 토마토만 열세 가지, 모두 합치면 150여 가지나 되었다. 손수 농사지어 나누어주는 마음을 거절치 못하고, 혹은 호기심과 귀한 씨앗을 가져보겠다는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수집한 결과였다. 씨앗 정리가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작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가능하면 작물을 돌려짓고, 땅이 좁으니 서로 돌볼 수 있는 작물끼리 섞어짓고, 조금이라도 다년생을 늘려보는 게 올해의 과제다. 밭의 동쪽 가장자리에는 생강을 심기로 했다. 바로 옆에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한 여름에도 그늘지고 시원한 곳이다. 구석진 곳이라 손이 잘 안 가는 곳이기도 해 생강에게 안성맞춤이다. 그 옆엔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다년생 산나물을 심기로 했다. 들기름에 참나물을 슥슥 무쳐먹는 상상을 하며 밭에 그림을 그린다. 한국인의 혼, 고춧가루를 자급하겠다며 음성재래고추를 한 줄 그린다. 그 사이사이엔 풀이 자라지 않게 고구마를 심어 멀칭 해준다. 옆 두둑엔 로마 토마토와 각종 허브를 잔뜩, 그 옆엔 아스파라거스와 딸기밭을 그린다. 한국에서 노지 월동하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검색해보니 둘을 섞어짓는 게 외국에선 이미 유명한 길드 조합이라 도전해보기로 했다. 감자는 헛골을 만들어 강낭콩과 섞어 짓고, 수확 후엔 옥수수에 콩을 섞어짓는다. 밭 중앙의 키홀 가든엔 잎채소와 허브를 심고 가을엔 무우를 심어야지. 동부콩 사이 그늘엔 열무가 자라고, 노랗게 익는 진안 노랑토마토 아래엔 바질이 자란다. 이웃 빵집에서 바질 페스토를 만드신다고, 바질을 잔뜩 키워달라 부탁하셨던 게 기억난다. 토마토 사이사이 바질을 가득히 그린다. 손이 잘 닿지 않는 십자 모양 두둑 가운데엔 체리나무 길드를 만들기로 했다. 부추를 둘레에 심어 풀을 잡고,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컴프리와 치커리를 심어 땅 깊은 곳의 영양소를 끌어올린다. 그 옆엔 한련화를 심어 포식 곤충의 안식처를 만든다. 한련은 잎과 꽃에서 알싸하게 매운맛이 나는데, 모양새와 맛 모두 아름다워 가장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다. 빨갛게 체리가 익어가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벌써 달콤한 체리향이 입안 가득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세우던 작부 계획을 마치니 50여 가지 작물의 파종 계획이 빼곡히 손에 들려있다. 이대로 다 잘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막상 하우스도 없이 베란다에서 모종을 키우다 보면 깜빡하고 놓치거나 방심한 사이 애벌레의 습격을 받는 게 일상이다. 한여름 땡볕과 모기가 달려들기도 전에 작부 계획 절반은 뒤죽박죽 바뀔 것이다. 그래도 상상만으로 즐거우니까, 그래서 괜찮다. 노트를 덮고 어젯밤 물에 침종 해둔 파프리카와 가지 씨앗을 모종 포트에 옮겨 심자 본격적인 농사 시즌이 시작된 게 실감 나게 다가온다. 봄이 움튼다. 씨앗을 돌보고 밭의 그림을 그리는 농부의 마음도 움튼다. 입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