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성운 Oct 26. 2021

[파이트 클럽]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요.  

화가 날 때는 주먹보다 케이크를 가까이 하자.



 간혹 시대의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임에도 놀라울만큼 내 취향을 빗겨가는 일이 있다. 나는 하도 재미없는 영화들을 강제로 봐서 그런지 노답인 흑백 무성영화가 아니고, 나홍진이나 타란티노 작품, 혹은 정말 완성도가 바닥을 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그냥 본다.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러려니 넘기거나, 영화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기도 한다. <셰임>처럼 어릴 땐 이해가 가지 않아도 나이가 들며 천천히 이해하게 되는 영화도 있으니까. 그러나 종종 아무리 봐도 도저히 이해 못하거나 싫어지는 영화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모두가 좋아하지만 나만 싫어하는 그 영화가 바로 <파이트 클럽>이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한다기보다는 내용을 전혀, 조금도 이해할  없다는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자세히는 “굳이  서로 때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쟤들은 피곤해 죽겠다면서 피곤하면 잠이나 자지, 뭐하러 모여 앉아서 남몰래 주먹질을 하나 대한 의문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애초에 영화의 기본적인 명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거다. 아니, 우리는 문명인으로 나고 자라 폭력과는 거리가 멀디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폭력은 범죄 행위고, 범죄가 아니더라도 어째서 굳이 타인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고 싶어하는지  마음을 공감할 방도가 없다.


 나는 상당히 심약한 사람이라 영화에서는 잘린 팔다리가 날아다녀도  생각 안하지만 현실에서는 작은 사고 장면만 봐도 심장이 뛰어서 청심환을 먹어야  지경에 이른다. 장난으로라도 타인에게 손을 올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을 보면 하루종일 속이 울렁거리고 누군가  소리를 내며 싸우는 일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내게 있어서 폭력이나 싸움은 “살다보면 어쩔  없이 생길 수도 있는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벌어져서는 안되는  가깝다.


 그런 사람이 주인공들이 갑자기 서로 주먹질을 하다가 파이트 클럽이라는 서로 쥐어 패는 비밀 결사를 만들고, 진짜 지하실에 모여서 서로 때리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개인적 감성을 버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이해가 어렵다. 차라리 식인 살인마 사이코패스 한니발이 연쇄살인 저지르고 다니는 영화나 고담에서 아무나 죽이고 다니는 정신나간 조커는 그냥 쟤는 미쳤으니까하고 대충 납득하고 보는데 <파이트 클럽> 인물들은 해리성 인격장애일지언정 사이코패스가 아니고, 파이트 클럽에 동조하는 놈들도 그냥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놈들로 나오니 파이트클럽의 존재 이유를 납득하기 힘겹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현대 사회 속에서 억압된 분노와 스트레스를 폭력이라는 1차원적이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며, 그래서 통쾌하고 강렬한거라고들 한다. 그래서  또한 분명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편의점 알바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공부 안하면 죽여버릴거야!” 라고 하는게  멋있는지 모르겠고, 폭력을 정의의 수단인 것마냥 휘두르는게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고 잘못된 말이 떠오르기만 할 뿐.


 영화 안에 폭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시선이 들어있었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내가  <파이트 클럽>에선 폭력에 대한 위험성이나 경고 메세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스크린 안에서 현실적인 폭력을 향한 즐거움과 우상화를 엿보았기에 그걸 공감하거나 긍정적으로 평하긴 곤란할 따름이었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 어떠한 개입도 없이 단독적인 예술로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나는 예술, 특히 많은 대중이향유하는 문화인 영화가 사회에 끼치는 파급력과 영향력을 충분히 고려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다. 그건 <조커> 보고 며칠을 불쾌했던 경험과 비슷하다. 폭력을 합리화하고 우상화하면서 ‘차별받고 억압받다보면 벌일 수도 있는 으로 여기는 것이 싫고, 그런 영화의 주인공들이 미화되는 것이 나에겐 불쾌감을 안긴다. 마치 인간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향해서 그래도 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면죄부를 주는 기분이 든다. 더불어  영화의 주인공들이 강자에게는 별로 개기지 않는다는 점도 개인적인 불쾌감을 자극하는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 체제를 부수겠다면서 기업 회장, , 현직 대통령한테 찾아가서 머리통에 총구 박고 “ 엿같은 법안을 제대로 수정하고 최저 임금을 올려주지 않는다면  죽여버리겠어.” 라든가, 자신을 차별하고 무시했던 덩치 크고 무서운 남성들에게 가서 “ 무시한다면 너를 고자로 만들겠다.” 라고 하지는 않는다. 죄없는 건물을 부수고 채무를 삭제하겠다고 날뛰면서,  채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게 만든 높으신 분들이 아닌 알바 머리통에 총구를 겨눈다. 폭력은 쉽게 학습되며  습관으로 변질되고, 폭력을 학습한 그들이 분노와 폭력을 표하는 상대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아니다.






 단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혹은  영화가 공감되어서 좋아하는게 그른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파이트 클럽> 감명깊게 보았다고 해서 모두 폭력에 가까운 사람인 것도 아니고, 영화를 영화 자체만으로 평가하고 즐길 수도 있다. 너무 열받아서 머그컵을 집어던지거나 책상에 주먹질을 하고 마는 분한 감정을 영화가 시원하게 해소해줬을 수도 있는거고 오로지 일회용품으로 연명하며 현대 문명에 매몰된  남자가 또다른거친 인격을 만들어 냈다는 반전은 놀랍고 신선할 수도 있다. 어쩌면 영화적으로만 보았을  단점보단 장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다만  개인적으로  영화가 “불호보다는 “불쾌 가까울 뿐이다. 어떤 영화는 완성도와 상관 없이 개인적인 감상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평가하게 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질  없는 영화가 있고, 아무리  만든 영화도 싫을  있다는  <파이트클럽>  때마다 느낄 따름이다.




 사실 요즘은  영화를 마주치게  때마다 그냥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받고 화가 나면 그냥 카페에 가서 브라우니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으면 되는데, 싸우지들 말고 복합 탄수화물이나 먹었으면 하고.


작가의 이전글 [캐롤] 마음에 당신이 쌓이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