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은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여러 학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부모와 같은 생활환경에서 오랫동안 함께 사니까요. 설마 나의 자녀가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를 닮을까요?
그런데 저의 딸을 저를 거의 닮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발가락까지 살펴보았지만 심지어 발가락 다섯 개의 배열 모양조차 다릅니다. 성격은 물론 식성까지 같이 산 이십 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생김새야 유전자의 절반은 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다행히 저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옛말은 틀리지 않는다는데 모전여전은 이제 부침개집 이름으로만 남은 걸까요?
아주 오랫동안 원망이 섞인 호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 내 자식이 나를 닮지 않았는가, 내 딸뿐 아니라 왜 많은 아들 딸들이 부모를 닮지 않았는가에 대해서요. 영화의 속편이 전편과 아주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듯 나중에 또 다른 답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린 결론은 자식이 부모를 닮을 시간을 주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깔끔한 부모는 지저분한 자식이 어지럽힌 방을 참지 못하고 대신 치워 줍니다. 똑똑한 부모는 덜 똑똑한 자식이 스스로 깨우치기 전에 먼저 가르쳐 줍니다. 부모가 하는 일은 점점 많아지고 자식이 하는 일은 좀처럼 늘지 않습니다. 부모는 점점 부지런해지고 자식은 점점 게을러집니다.
처음에는 성과가 금세 나타나는 참으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부모가 대신해주는 자식들이 어릴 때는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점차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정말로 깔끔하고 똑똑하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방을 어지럽히는 수준과 배워야 하는 지식의 수준은 비교적 낮은 편이거든요. 그래서 부모가 대신해 주는 효과가 크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반드시 자식이 홀로 서야 합니다. 청소는 끝까지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공부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식의 공부 홀로서기는 아무리 늦추고 또 늦춰도 중학교 졸업 전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중학생 때까지는 엄마가 요약하고 읽어 줘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자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자식의 공부에 학원비를 지출하는 일을 제외하면 부모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때부터는 자식의 의지와 자식의 습관과 자식의 지적 능력만으로 싸워야 합니다. 학원이란 곳도 그 세 가지를 가진 학생들에게나 도움이 됩니다.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치동 키즈로 커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습관은 대치동이 키워주기도 하지만 의지와 지적능력만큼은 천하의 대치동도 키워 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딸이 재수를 할 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여러 명의 코치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감독이었습니다. 비싼 돈 낸 재수학원에서 국어수업은 듣지 않고 엄마표 수업을 듣겠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때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치열한 고민을 했습니다. 재수학원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제가 조금씩 도와주는 짬짜면 제안도 했습니다. 힘들게 손을 떼고 마음을 내려놓았는데 다시 지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저는 물론이고 딸에게도 옳은 일인지 판단이 힘들었습니다. 딸이 이제 정말 정신 차렸다고,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평소와 좀 다른 표정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저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무보수의 노동력 착취에 절대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노동력 착취보다 감정 착취가 훨씬 두렵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딸은 이제 청소를 제외하면 뭐든지 혼자 합니다. 1년은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니 안 그럴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연세대학교는 많은 엄마들을 해방시키려는 심오한 의도를 갖고 강제기숙사 제도를 만든 것일까요? 딸의 룸메이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청소도 둘 사이에 해결할 문제입니다. 소형 무선 청소기를 사 주는 것으로 엄마 역할은 끝내기로 했습니다. 룸메이트가 화를 내거나 자기가 불편하면 척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청소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홀로서기가 아주 늦었는데 다행히 성공적입니다. 미숙하면서 조급했던 엄마가 어릴 때 마구마구 앞에서 끌며 공부를 시킨 것을 딸은 원망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해 줍니다. 홀로서기가 늦어 친구들이 하는 양을 눈치껏 보며 따라가느라 음주운전을 하는 것처럼 중앙선을 가끔 넘고 페달을 잘못 밟아 가끔 급발진이나 급정거를 하지만 곧잘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 가서 주저앉았는데 딸은 대학 가서 비로소 섰습니다. 딸이 저를 닮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제가 딸을 닮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연세대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