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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위시 Sep 27. 2022

피임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캐나다에 온 것은 벌써 10년 전, 2012년이다. 캐나다의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바로 영주권을 받기로 해서 당시에는 임신을 일부러 미루었었다. 그렇게 2015년 초 영주권을 받고 나서야 우리는 가족을 꿈꾸게 되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둘 다 젊었고, 임신이 바로 되지 않는 것을 사실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우리는 피임만 하지 않으면 바로 임신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고, 나는 원래부터 생리주기가 별로 규칙적이지 않았는데 이게 딱히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했던 나를 꾸짖고 싶지만, 당시만 해도 이제 막 30대에 접어들고 막 이민을 마친 나에게 임신과 출산은 당장에 급한 과제가 아니었었다.


임신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사실 우리가 임신이 안되어서가 아니라, 아는 언니 커플 때문이었다. 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형부는 그 언니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둘은 나이에 쫓기고 있었고, 배란일을 받고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는 등 임신에 적극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 흔한 패밀리 닥터조차 없었고, 산부인과 의사나 스페셜리스트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 언니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난임 열차에 빨리 뛰어든 셈이다.


언니 덕분에 우리는 패밀리 닥터도 배정받았고, 이미 임신 시도가 6개월이 넘었다니까 패밀리 닥터는 바로 산부인과 의사를 소개해주었다. 배란일의 개념을 알게 된 것도 이쯔음 이었다. 청소년기부터 한 번도 생리가 규칙적 인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배란일을 규칙적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었고, 의사는 내게 배란이 되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PCOS)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가 그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었기 때문에 배란 약과 배란테스트기, 그리고 체온계에 의지를 했었다. 아는 언니가 동시에 임신을 준비하며 이 세 가지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던 내게는 사실 딱히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다낭성이 있다면 LH수치가 늘 높은 편이고 나는 약간의 저체온증이 있어 배란기 중에도 내 체온은 올라가지 않았다.


문제는 캐나다의 느린 의료체계와 난임에 대한 캐나다 의료계의 태도였다. 캐나다는 100프로 정부지원 공공의료로 진행이 되는데, 2022년 현재까지도 캐나다의 출생률은 1.5명 이상으로 딱히 낮지가 않아서 난임 분야는 공공의료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은 한국과 다르게 각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한정되어있는데, 일반 산부인과 의사를 보는 것조차 사실 딱히 쉬운 일이 아닌 이 나라에서 난임 전문 스페셜리스트를 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산부인과 의사가 추천서를 써주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 난임 전문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지금이야 캐나다도 각 도시마다 난임센터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난임은 공공의료의 영역이었고, 난임 관련 테스트도 한정되어있었다. 몇 달을 거쳐 처음 만난 의사는 나름 저명하다는 산부인과 전문의 닥터 S 였다. 거의 60을 바라보는 할머니 의사였는데, 그분을 통해 아이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좋은 의사를 배정받았다고 간호사가 축하해주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에게 들은 첫마디는 바로


"아직 젊은데?"였다.


당시 만으로 서른을 조금 넘긴 나와 아직 20대인 남편은 그녀의 눈에는 난임을 논하기에 너무 젊은 나이였던 것이다. 닥터 S는 각종 기본검사를 해보았고, 기본검사상 우리는 하자가 전혀 없었다. 젊고, 건강했고, 아직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에게 자연임신을 시도해보자고 시작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했던 것과 같은, 배란 약을 먹어 배란일을 유도하고, 자연스러운 부부관계를 통한 임신 시도부터 하자는 거였다. 임신을 마음먹은 뒤로 1년 가까이 피임 없이 임신 시도를 해왔는데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또다시 같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의사의 권유를 따라 우리는 그렇게 또 3개월을 흘려보냈다.


난임을 겪어본 사람들은 잘 안다. 매달 만나는 홍양이 딱히 반갑지 않다는 것을. 약까지 먹어가며 생리를 조절해가며 시도를 하는데도 만나는 생리는 마치 "실패"라는 꼬리표처럼 느껴졌다. 이 와중에 주변에서는 임신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캐나다는 한국보다 결혼 및 출산이 빨라서 (게다가 남편은 시골마을 출신이라 더더욱 빠르다. 25살에 나와 결혼했는데 주변에 미혼 친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었으니) 나는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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