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우리가 호텔에 묵었던 날은 평일이었고, 우리는 패밀리 닥터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원래대로라면 패밀리 닥터와 연결되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지만, 내가 "유산"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패밀리 닥터에게 연락이 왔다. 안타깝게도 내가 묵고 있던 레디움 핫 스프링은 작은 동네 관광지로 병원조차 구비되지 않은 곳이었고, 의사는 일단 임신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근처 마트가 있다면 임신테스트기를 하나 사서 임신테스트기로 체크해볼 것을 권유했다. 만약 임신테스트기가 양성으로 나온다면 유산이 맞으니 다시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임신 준비를 하며 수많은 임신테스트기를 써왔지만 늘 한 줄이었다. 아쉬움을 동반했던 그 임신테스트기 한 줄을 그렇게 간절히 바라봤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동네 마트는 작았고, 혹시 하나만 해서는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두 개짜리를 구매했다. 호텔에 돌아갈 시간조차 없이 마트의 화장실로 달려갔다.
두줄이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본 두 줄. 그렇지만 이미 떠나간 두 줄이었다. 아마 임신 준비를 해본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임신테스트기도 광고를 한다. 두 줄을 보고 행복감에 휩싸여 얼싸안는 함박웃음을 한 외국인 커플. 보통의 임신테스트기 두 줄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무려 5년을 기다려 처음으로 맞이한 우리 커플의 두 줄은 폭풍과 같은 오열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기대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고, 남편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나를 토닥거리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디에 가지도 못하고 마트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던 커플을, 한여름의 유명 관광지에서 그렇게 오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른 사람들은 알았을까.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진정이 된 나는 다시 패밀리 닥터에게 연락을 넣었다. 문제는 우리가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밴프는 집에서 차로 5시간 반, 우리가 당시 묵고 있던 레디움 핫 스프링은 거기서 추가로 1시간 반이 걸렸다. 주변에 마땅한 의료시설도 없었다. 의사는 통증이 아직도 있는지, 피는 얼마나 나는지 확인을 했고, 아침에 유산 이후 통증은 확연히 줄어들었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혹시 모르니 배가 아프면 바로바로 타이레놀을 먹으라며 권해주었고, 웬만하면 더 이상의 산행이나 무리는 하지 말고 잘 눕고, 잘 쉬고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와 친구들의 '유산도 애를 낳은 거나 마찬가지야, 쉬어야 해"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몸보다 마음이 훨씬 더 아팠다. 이대로 7시간을 들여 집에 들어간다한들 다친 마음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그 안에서 힐링 포인트를 찾는 게 나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도 나는 남은 2일간의 여정을 마무리 짓고 예정대로 집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필 한참 울고 나서 눈을 들어보니 그곳에 레디움 핫 스프링의 성당에서 제공하는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었다. 살짝이긴 하지만 오르락내리락 경사도 있는 십자가의 길을 남편과 함께 울다가 웃다가 하며 걸었다.
사실상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만약 생리가 늦어지는 것이 임신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임신테스트기를 했었더라면? 전날에 길을 잘못 들지 않고 예정대로 5킬로미터 정도만 걸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 아이를 지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나는 그 흔한 임신 증상 하나 느끼지 못해서 이렇게 흘려보낸 걸까. 가족도, 남편도, 의사도, 친구도 모두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임신인데 기뻐할 새도 없이 바로 가장 큰 슬픔에 빠져들어갔다. 가까운 호숫가에 가서 바람을 쐬며 드러누워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어보았지만 입에 마치 모래를 털어 넣는 것처럼 입이 썼다. 그래도 아름다운 풍광이 마음을 조금은 위안해 주는 듯했다.
다시 캠핑사이트로 돌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고, 샤워시설이 없는데도 나는 억지로 남은 이틀을 채워 묵었다. 모두가 빨리 집에 가는 것을 권고했는데 나도 생각해보면 어지간히 고집쟁이 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혼나 마땅한데 당시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위로도, 관심도, 다 필요 없었다. 그저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나를 좀먹고 있었고, 좋은 풍광만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에 원래 하려던 몇 킬로미터씩 되는 하이킹은 취소했지만, 그렇다고 어딜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밴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레이크 루이즈에 가서 두어 시간 누워있다가 오기도 했고, 유명한 호텔에 가서 소파에 한참 앉아있다 오기도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캠핑기간을 모두 채운 마지막 날, 남편과 유명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먹는데, 갑자기 배가 찢어지는 고통이 다시 느껴졌다.
타이레놀을 바로 털어먹었는데도 약효가 들지 않았다. 배는 점점 더 아파왔다. 다행히 밴프에는 병원이 있었기에 남편이 급히 차를 가져와서 끙끙 앓는 나를 응급실에 데려갔다. 응급실 의사는 산부인과는 잘 모르지만 유산을 했다면 쉬어야지!라고 나를 꾸짖고는 하혈이 너무 심하다고 하면서 얼른 도로 에드먼턴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에드먼턴 관련 병원에 연락을 미리 넣어줄 테니 쉬지 말고 달려가라고. 의사가 그래도 진통제와 수액을 조금 맞춰주었고, 입에 한껏 털어 넣었던 진통제 약 빨도 돌기 시작해 5시간 거리를 달려 에드먼턴의 병원에 도착했다. 캐내다의 응급실에서 의사를 바로 보는 것은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닌 이상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나 또한 아무리 유산을 했어도 당장 죽어나갈 정도로 고통에 차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무한 대기를 해야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남편을 비롯한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두 명의 여성이 만삭의 몸으로 진통이 왔다며 들어왔고, 휠체어에 실려 어디론가 보내졌다. 그녀들을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만난 응급실의 산부인과 의사는 피검사와 내진을 해보더니, 유산이 진행된 것이 맞지만 의외로 깔끔하게 진행되어서 남은 것이 크게 없다며, 이대로 며칠만 집에서 쉬면 되겠다고 해주었다. 혹시 잔여물이 있을지 모르니 초음파도 예약해주었다. 그러면서 "유산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지만, 유산 후에 몸을 관리를 잘하지 않는 것은 엄마의 잘못이 맞아요. 지금부터라도 푹 쉬어요"라고 꾸짖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피검사 결과는 물론 양성이었다. 내 생애 첫 임신 호르몬 양성, 내 생애 첫 임신테스트기 양성. 내 생애 첫 임신은 그렇게 내가 왔는지도 모르고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