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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은 Apr 30. 2022

시시포스(Sisyphus)

우리의 행복은 결코 고통받지 않는다.

살아생전 하데스, 타나토스, 제우스, 아레스 등 신들을 엿 먹이고도 천수를 다 누리다 평안히 죽은 비범한 인간 시시포스.


그리스 신화 속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인 시시포스에게는 죄가 많다. 그는 어린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고자질하였고, 제우스의 만행을 방해하고, 자신을 저승으로 데려가려 온 타나토스를 가두었으며, 지하세계의 아버지인 하데스를 속이고 천수를 누렸다. 한낱 인간이 신을 마음껏 농락했다.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렸다. 저승에 간 시시포스는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끝없이 밀어 올린다. 이내 뾰족한 꼭대기에 다다르면 바위는 반대편 사면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말 힘들게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는 그 순간이 바로, 힘들게 올려놓은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순간이다. 성취가 좌절로 바뀔 수밖에 없는, 노동의 의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한평생 좌절뿐인 무기력한 삶이 그에게 내려진 처벌의 핵심이다.


시시포스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현재는 무의미한가.




불행을 이기는 철학, 스토아 철학의 시선을 빌려 이 질문에 접근해본다.


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의 섬 도시 키티움 출신의 제노(Zeno)가 아테네에서 창시했으며, 에픽테토스(Epictetus)와 세네카(Seneca),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등이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들의 핵심사상은 "인간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시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에픽테토스의 말로 잘 표현된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바람직한 삶으로 제시한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처음부터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사건에 대한 우리의 내적인 태도와 의지뿐이다. 따라서 모든 외적인 것들은 선, 덕, 행복과는 무관하다. 선, 덕, 행복의 기초는 우리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즉 우리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다.


에픽테토스는 고통에 관하여 이런 논평을 했다. "누군가 그대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먹질을 하더라도, 그 일이 당신에게 꼭 모욕되리란 법은 없다. 이를 기분 나쁘게 여길지 말지는 그대의 선택에 달렸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건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절름발이 노인네라 칭했던 그는, 노예시절 주인의 장난 때문에 다리가 뚝 부러져 버린 상황에서도 "그러게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행복은 우리 뜻대로 해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에 비례한다고 말한 그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일화이다. 이처럼 고통은 외부의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고통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평소 스스로를 '결또장'으로 부르는 장자 빠순이는 결국 또 장자의 우화를 빌린다.


어느 날 자사와 자여와 자려와 자래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의 일생이란 무(無)가 머리가 되고, 삶이 등이 되며, 죽음이 꼬리가 되는 것임을 확실히 체득한 사람이 누구일까? 삶과 죽음이 태어남과 죽음이 모두 하나의 다른 모습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더불어 사귀고 싶구나." 이 말에 네 사람 모두 생각이 일치해 빙그레 웃으며 벗이 되었다.

벗이 된 얼마 후 자여에게 병이 났다. 문병을 간 자사가 말했다. "천지자연과 그 모든 현상을 빚어내는 조물주는 불가사의하고 위대하시기도 하지. 어느새 자네를 이렇게 꼽추로 만들고 있구먼. 등은 활처럼 굽고, 오장은 흉곽으로 올라붙고, 턱이 배꼽 아래로 내려오고, 두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이 솟아,  뒤 퉁수의 상투가 되려 정수리마냥 수직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군 그래."
 
자여는 으슬으슬 춥고 간간이 열이 났지만,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렇지도 않았다. 간신히 비틀거리면 우물가로 가서 몸을 비춰보며 말했다. "아아 조물주가 정말 나를 이렇게 꼽추로 만들고 있구나!" 자사가 물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만일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변하여 활이 된다면 새를 잡아 꼬치구이를 만들겠네. 또 내 엉덩이가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마음껏 내달려 보리.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 몫의 시간이 되면 몸을 얻어 살다가, 내 몫이 다하면 다시 몸을 벗고 돌아가는 것이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때 맞춰 편안하게 났다가 거슬림 없이 떠나는데 어찌 생사의 애달픔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말하던 대로 삶의 끄달림에서 벗어난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집착을 놓지 못해 생사의 괴로움에 시달리곤 하지. 사람이 어찌 자연의 변화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모든 것을 깨달은 내가 어찌 내 모습 따위에 싫다느니 좋다느니 하며 마음을 쓰겠는가?"

- 대종사


팔이 닭 모양으로 꼬인다면 아예 내 왼팔이 닭이 되어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는 자세,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렇게 명백히 주어진 상황을 애써 부인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행복의 시작이다. 외부의 불변하는 상황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오롯이 우리만이 통제할 수 있는 생각, 의지, 미래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다면 삶의 끄달림에서 벗어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장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본질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성실하게 삶을 수행하는 것. '인위로서 자연을 멸하지 말라(無以人滅天)'라는 도교 사상의 핵심은 스토아 철학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어보인다.




'무위'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도록 하고 다시 시시포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조리 문학으로 알려진 알베르 까뮈는 책 <시지프의 신화>에서 그가 바위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려 올리는 모습을 부조리에 맞선 '인간승리'로 평가하며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라고 말했다.


과연 정상위에 바위를 매어놓는 것만이 성공일까? 상 정상으로 향하는 매 순간을 도전으로 느낀다면 어떨까. 끝없는 좌절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데에서, 계속 도전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이보다 무궁무진한 행복의 기회가 없다. 어쩌면 그는 이미,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보고 있지는 않을까?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고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겠지만, 비탈길을 내려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며 고된 노동 끝의 휴식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지는 않을까.


신들에게는 영락없이 재수없는 악동이었지만, 인간들에게는 당대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선망받았던 바로 '그' 시시포스다. 죽음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천수를 누렸던 그다. 분명 신들은 그가 죽은 후에 끝없는 무기력을 형벌로 내렸지만, 나는 왠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신들을 기만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주어진 결과를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저항이자 삶의 의미 그 자체이지 않을까. 이러한 그의 모습은 반복되고 지치는 일상에서도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우리 '현대인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나는 오늘도 시시포스를 응원한다. 우리의 행복은 결코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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