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HILOPHYSIS Dec 01. 2023

집안일과 티

예전에는 집안일이 왜 그리 하찮게 느껴졌을까. 뭔가 '여자가 하는 것'이란 오랜 고정관념에 저항하고픈 마음에, 결혼 초기부터 반반 정확하게 했더랬다. 한다 해도 억지로 해치웠다. 20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지는 여성의 경제활동과 더불어 여성 스스로 집안일을 소외시켜 온 것 아닐까. 그러한 흐름 속에서 나의 지난 마음이 해묵은 것임을 알아차리기엔 다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씩 조금씩, 강의 듣는 김에, 잠시 쉬는 김에, 살림살이를 손에 잡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자리가 생기더라. 그 자리가 넓어지는 것을 아늑히 여기고 나서 보니, 그게 곧 한때 가벼이 여겼던 집안일이고 가사 노동이더라. 그뿐일까. 남편과 아들도 밖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비로소 쉬게 할 수 있고, 나도 오며 가며 주의가 산만해질 일 없으니 평온한 그 맛을 알게 된 것이다. 함께 사는 사랑하는 이들이 편안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먹고 자고 입으며 놀고 쉴 수 있는, 때로 일을 할 수도 있는 이곳에서 매일의 흐트러짐을 나름의 질서로 다독이는 집일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루틴이 된 이유다. 비록 티가 나는 성취라 볼 순 없지만, 내가 느낀다. 누가 시켜서도 아닌, 당연하게 여겨짐으로써 그저 관성대로 하는 것도 아닌, 누가 알아줘서는 더더욱 아닌 이 움직임으로 인해 작디작은 각자의 세계는 정화된다. 



흔히 '집안일은 하면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난다'라고들 한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잖아'하며 쉽게 미루곤 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 그 일에서 그 사람은 의미를 못 찾은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게 뭘까를 파고 들어가면, 이 또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중심에서 가족을, 사랑을 발견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사실 사랑 말고 뭘 더 볼 수 있을까? 그러면서 가사에 대한 나의 비겁한 관점도 전환이 되었던 것 같다. 



'티를 내다'에 꼭 맞는 영어 단어는 별로 없나 보다. 뭔가 보이게 하고 보여준다는 의미의 'show', 'obvious' 정도. 사투리이면서도 흔하게 쓰이는 말, '티 내다'. 티 내는 거 너무 짜릿하다. 티도 지독히 내봤기에 기억한다. 지금은 그 모든 과거를 지우개로 쓱싹 지워 버리면 좋겠다 싶다. 사실 별로 티 낼만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금 티 내고 있는 그 모든 티, 사실 번데기 앞 주름 같은 것이다. 제일 티 내기 좋은 간판은 뭐가 있을까? 굳이 늘어놓지 않아도 딱 생각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 티다. 밖으로든 안으로든 가진 게 별로 없을수록 티 내고 싶은 법. 



다시 집안일로 돌아와, 티 나는 일하고 집에 오면 티 안 나는 일은 더더욱 안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무엇보다 바깥에서 티 내느라 이미 방전이 되어 버린다. '하, 집안일... 어차피 티도 안 나는데. 주말에 하자.' 그때의 내게 묻는다, '근데 누구한테 뭘 티 내려고?' 티 내려함 또한 습관이다. 티 내고 싶은 이는 티 나는 것만 먹고, 입고, 고르고, 한다. 굳이 티 내지 않아도 자족하고 편안한 이는 그 어떤 것도 티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러나 훨씬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산다. 그러곤 자기 삶에 온전히 집중한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더 나아지고 싶은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한다. 이것을 왜 하는지, 굳이 누군가에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걸 왜 사고, 굳이 왜 여길 갔는지, 자신의 선택, 행동에 대한 이유를 늘어놓으며 합리화하지 않는다. 그냥 누군가 물으면 대답해 준다. 어떠한 티도 보태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나는 거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아왔는가. 뭐가 그리 부족해, 티 내려했는가. 그 티는 누구를 위한 티였나. 그 티가 내 삶에,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과연 무엇으로 드러날까. 티, 안 나도 괜찮다. 티 나는 일 아니어도 본인은 안다. 티 나는 것만 좇다가 결국 그 티가 나를 옥죄는 순간을 한 번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옥죔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속에서 자라난 것일 뿐임도 보게 될 것이다. 



그걸 마주한다고 한순간에 확 바뀌지 않는 것 또한 사람이다. 그러한 관성에 지독히 저항하는 순간 또 집착으로 변질된다. '티 낼 수도 있지 뭐.' 나에 대해 타인에 대해 조금 너그럽게 포용하면 서서히 달라진다. 예전엔 그 '너그럽게'라는 단어가 참 어려웠다. 지금도 사실 어렵지만, 작은 경험들이 나를 변하게 해주는 것 같다. 밝고 아무런 고민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조금만 함께 마음을 나누다 보면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거나 있다. 아직 없었다면 있을 예정일 것이다. 그건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누구도 피해 가기 어려운 굴레 같은 것이다. 각자 타이밍이 다를 뿐. 조금 너그러워진다. '아 몰랐는데, 힘들었겠다.' 그걸 이겨내고 지금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참 다행이기도 하고 그 힘든 것을 어떻게 저리 잘 지나갔을까 존경심 어린 호기심마저 생긴다. <내면소통>의 김주환 교수가 설파하듯,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pity) 말고, 그 사람이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연민(compassion).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나와 마주치는 인연에게도 그런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의 저자 마이클 싱어는 꿈을 꾸고 있음을 지각하는 자각몽과 일반적인 꿈이 다른 것은 그 상황 속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 자각을 통해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시야가 가린 채로 넋을 잃은 채 살지는 말자. 티 내기를 해부했다고 해서 '오늘도 티 냈구나'하며 너무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남 비난할 것도 없다. 이제는 적어도 합리화하진 않을 테니까. 거기에 푹 빠져있지도 않을 테니까. 내가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고, 때로 관성에 지기도 하지만, 덕지덕지 이유를 붙이며 자기 최면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나 가벼울까. 티 내고 눈치 보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면. 오늘도 빈 빨래통들을 보며 그 속 시원한 비움을 만끽한다. 빨래통만 비우겠나, 몸도 마음도 옷장도 달력도 바닥도 창고도 자리가 난다. 나를 돌볼 자리, 내 사랑들을 돌볼 자리. 








매거진의 이전글 별다를 것 없는 매일이 별다를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