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을 샀다. 차분하고 어딘가 단단함을 지니고 있는 듯한 색. 어떤 것은 투명한 듯 어둡고 어떤 것은 깊고 묵직한 색의 결을 품고 있다. 무얼 만들지 결정도 하지 않고 꽤 폭이 긴 캐보숑컷의 원석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며 이런 느낌? 하며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다 다른 원석과 함께 계산했다.
원석을 파는 사장님은 본인이 직접 가공을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예전엔 왜 그리 원석이 비싼가 하며 볼멘소리를 삼켰지만, 돌아다녀 보니 싸면 싼 데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더라. 외국에서 가공한 원석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본인의 기술로 깎아낸다고 하신다.
와, 사장님. 정말 멋진 기술을 가지셨네요.
그 한마디에 사장님의 장사꾼 표정에서 온화한 본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있지, ᄋᄋ 연도에 시골에서 와가지고 그때 힘들어서 배웠지, 이거 이거 다 내가 한 거야, 저기 작업하는 데 따로 있어, 여기 없음 거기 있는 거야 (…)
하시며 그동안 보지 못한 발랄함을 보여 주셨다. 계산할 때도 더 깎아 주시길래 손사래를 치니 커피 한 잔 사 먹으라며 더 쭉 내미셨다. ‘에이 참’하며 받고 나왔더랬다. 말랑말랑해. 다음번에 떡볶이 사 와야지.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의도하는 것은 결코 아닌데, 말 한마디에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던 두터운 벽이 조금씩 얇아지는 느낌.
어느 사장님은 본업 이외에 취미로 시작한 미술로 상도 받고 최근 전시도 열었다. 그분 뒷자리에는 그 자랑스러운 작품들이 겸허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놓여 있다. 그 세밀한 작업에 감탄하여 물었다. 사장님 이거 사장님이 그리신 거 아니시죠? 잠깐 기다리는 사이에 던진 질문 하나가 따듯하고 온정 있는 대화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참, 이분에게 이런 순수한 열정이 있으셨구나, 몰랐는데 정말 재미있게 사시는구나, 이렇게 좁은 데서 반복적인 일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 누구보다 깊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시는구나, 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이미 그걸 알면서도 또 깨닫게 되니까, 이제는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다. 지금도 조금 낯설지만.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하면, 궁금함이 올라온다. 그럴 때는 그냥 물어보면 된다. 그런 물음 자체가 차갑고 딱딱한 가면 뒤의 사람을 빼꼼 불러낸다. 이내 무언가가 허물어진다.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시던 분은 결국 내가 자리를 뜨는 것을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인사해 주셨다.
어쩌면, 우리의 느슨한 관계들은 그런 색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더 자주 대하는 관계는 그런 관계 아닐까. 막 화려하거나 정겹고 따듯하거나 완전히 차갑지도 않은 색.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색. 눈에 띄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깊고 차분한데 단단함이 스며 있기까지 한 색. 그 색은 아마도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빛.
그 색으로 나는 무엇을 만들어볼까. 요즘 그러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