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 온리>,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나이가 좀 드니 장례식장을 제법 다닐 일이 생깁니다. 친구들과 술을 먹으며 결혼식 예정에 대해 듣던 그때, 저는 카톡으로 친구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았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는 삶의 찬란함과 기쁨을 만끽하며 떠들고 있을 때, 누군가는 삶의 끝을 마주한 채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분위기의 장례식장에서 죽음은 시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상복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영정에 생의 길이가 찍힌 주름이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어지러운 순간 속에서 나는 물었습니다. 과연 나는 생의 마지막날 무엇을 할 것인가?
스피노자의 말로 알려진 유명한 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멋진 말입니다. 세상이 끝이 온다한들 평정을 잃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을 하겠다. 그런 뜻을 가진 말이지만, 사실 이미 많은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절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세상의 끝이 온다는데 무슨 이성적으로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할까요? 그냥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입니다. 세상의 끝으로 얘기하니 이성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대 담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뭉뚱그린 애매한 말이 아닌 우리 삶의 끝, 죽음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생을 담은 시간의 끝, 죽음이 바로 다음 날이라면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싶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기가 가장 편해하는 가장 좋아하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자주 쓰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가족에게 둘러싸여서 웃다가 조용히 집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의 끝으로 말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가족은 분명 가까운 존재고, 대부분이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가족 또한 타인입니다. 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고,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사실 표면적인 부분들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우주에 아무 의미없이 단독으로 떨어진 우리는 홀로 존재합니다. 홀로 왔고, 홀로 존재하기에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존재만이 확실할 뿐 존재하는 이유인 본질은 사실 우리가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타인은 우리의 본질을 정의합니다. 사실 본질은 존재 뒤에 따라오는 것을 뿐인데도요. 이것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목적인 본질보다 삶에 떨어진, 던져진 이 상황, 존재가 먼저인 것. 그렇다면 우리는 늘 삶을 홀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홀로 살아온 삶에 끝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짓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존을 주장했던 사르트르도 곁에 누군가를 계속 두었습니다.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다양한 여성들과의 관계를 만들었고 지속했습니다. 말년에는 많은 재산으로 여대생들을 유혹해 관계를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실존을 알기에 외로웠던 걸까요? 아니면,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어떤 쾌락에 몸을 맡겼던 걸까요? 그런 관계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사르트르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을 했습니다.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 구태여 결혼까지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사르트르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사르트르의 대척점에서 늘 주장했던 카뮈는 늘 말했던 사랑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끝에서 마주한 삶의 균열들. 거기서 나오는 각종 삶의 부조리.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삶을 카뮈는 이야기했습니다. 여기 시간이 정해진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두 영화가 있습니다. <이프 온리>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시간의 끝, 삶의 끝을 마주한 채로도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이 영화들에서 어쩌면 마지막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프 온리>에서 이안은 사만다와 오래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일에 치여 사만다의 졸업 공연까지 까먹은 이안과 이안을 챙기려다 이안의 사업까지 망쳐버린 사만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망가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민중인 이안은 졸업 공연을 향해 가는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는 질문합니다.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못 본다면 살 수 있어요?”
이안은 이 질문을 듣고 나서야 자기 마음을 깨닫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을요. 하지만, 그는 식사 후 저녁자리에서 그녀를 더 사랑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버텨보겠다는 말을 합니다. 사랑을 받고 싶었던 사만다는 버텨보겠다는 말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떠납니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 사만다와 같은 택시를 탈지 말지 고민하다 택시를 보낸 이안은 사만다가 택시 안에서 교통사고가 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도 마주합니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그녀가 남긴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잠든 이안이 마주한 건 죽은 날의 또 다른 아침입니다.
삶은 단 한 번입니다. 삶이 어떻게 흐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태어났다고, 우리의 삶을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엮이고, 예측불허한 자연과 엮이면서 우리 삶은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흐름. 세계의 무정한 법칙, 또는 운명이라 부르는 그것들은 우리의 의지가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합니다. 선택해서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들기도 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죽음으로 가는 행진 위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안은 선택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 곁에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녀를 위한 삶을 택합니다. 그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줍니다. 자기가 숨겨온 과거를 밝히고,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 그녀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어줍니다. 그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 운명 속에서 빛나는 삶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저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난 영영 사랑을 몰랐을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
“진정한 사랑을 했다면 ,,,인생을 산거잖아 5분을 살든 50년을 살든…”
그는 딱 하루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만다 대신 죽음을 택합니다. 이안의 감정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은 사만다에겐 슬픔이 남습니다. 빛나는 삶 이후의 적막만이 남습니다. 사랑으로 만든 선택은 아름답고 멋지지만, 결국 남은 것은 이안이란 존재의 부재 뿐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냉정하고 잔혹합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두 남녀의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타카토시가 5살일 때 에미는 35살, 타카토시가 10살일 때 에미는 30살, 이런 식으로요. 그 둘은 각자 서로가 5살일 때 서로의 목숨을 구했고, 20살일 때 30일동안 짧은 연애를 합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속에서 30일만 연애할 수 있는 그들은 30일 매일을 보면서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이 거꾸로 흘러 고백하고 사귀며 감정이 고조되는 정방향의 연애를 하는 타카토시와 달리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로 시작해 점점 멀어지는 역방향의 연애를 하는 에미의 순간은 기쁨과 동시에 슬픔이 가득하죠. 하지만, 그들은 이 엇갈린 순간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난 시간들이 함께해 왔고, 함께해 나간 소중한 운명이라면서요.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죽음에서 구원함으로써 이 길고 긴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이 죽음이 갈라놓는 것은 아닐지라도 엇갈린 시간의 축이 갈라놓습니다. 시간의 끝이 명확하게 존재합니다. 더 많이 보고 싶고, 곁에서 함께하고 싶은 그들의 감정은 시간의 운명 앞에 막힙니다. 쌍방향으로 닿을 수 없는 끝이 명확한 관계에서 그들은 사랑을 하기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만남의 한 순간을 위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이것이 그저 순간에 몸을 맡긴 감정뿐일 사랑일지, 혹은 그 사랑이라는 것이 가져다준 영원일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편린으로만 살펴본 제가 판단하는 것은 오만한 일입니다. 다만, 존재가 우주에서 사라짐을 이야기하는 실존의 관점에서 영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가 사라진 상태에서 존재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는 후의 사람들에 의해 그러니까 타인들에 의해 정의되고 평가될 뿐입니다. 그가 남긴 감정이든 그 감정 너머의 사랑이든 영원은 없습니다. 존재가 사라졌으니 그 존재가 소유했던, 그 존재를 만들었던 순간들은 바스러져 사라질 뿐입니다.
<이프 온리>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 거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의 대상화에 불과한 뿐일 그 말이 남긴 것은 부재에 의한 고통일 뿐입니다. 기쁨은 한 순간,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안의 죽음도 타카토시와 에미의 엇갈린 시간도 고통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타인은 지옥이고, 그것을 무시하고 가진 사랑이라는 관계도 고통만을 가져옵니다. 사르트르의 삶에서도 카뮈의 말에서도 실존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을 택했지만, 사실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 끝. 죽음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존을 이겨내기 위해 한 선택, 사랑은 사실 새드엔딩입니다. 외로움을 몰랐던 삶을 잘 살고 있던 이에게 타인의 온기를 전해준 사랑은 더 깊은 외로움을 사람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하여 타인이 내 삶에 들어와 만든 소음은 이제 적막함만을 남깁니다.
화가 김환기의 죽음 이후 찾아온 쓸쓸한 침묵을 아내인 김향안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시끄럽던 목소리가 뚝 그쳐버리니까 이렇게 조용하다.”
끝이 있는 우리의 삶은, 그리고 사랑은 새드엔딩입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왜 끝이 명확한 이 삶에서 지옥과도 같은 타인을 마주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사랑을 왜하는 걸까요? 우리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갈 수는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