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군 휴가를 나와 그냥 세운상가를 가고 싶어져서 간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곳에 남은 것은 낡은 건물과 그 건물을 지키는 몇몇 상점뿐이었습니다. 새로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제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 그곳은 빈 복도와 함께 제 기억을 함께합니다.
세운상가는 중경맨션이라는 홍콩의 건물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합니다. 두 건물 다 근대 건축의 차가움을 갖고 있고, 건물이 위치한 곳이 땅값이 비싸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두 건물은 많이 다릅니다. 세운상가가 죽어가는 건물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 중경맨션은 세워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람이 살아온 곳입니다. 물론 이전에 살았던 이들과 지금 사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다르지만, 나름 홍콩을 대표하는 건물로 계속 기능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슬럼화로 인한 악명이 높다는 것이 문제겠죠. 슬럼화로 건물은 더욱 미로 같아졌고 알 수 없어졌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공간이 변화합니다. 사람들이 얽히고 관계가 뒤섞여 미지의 덩어리가 됩니다. 생물체들이 뒤섞여 미지의 무언가를 만드는 공간, 바로 숲입니다.
숲에서 길은 복잡합니다. 이제 숲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숲에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숲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며 위안을 삼을 뿐입니다. 숲을 멀리서 보며 현실은 마주하지 못하고, 환상을 좇을 뿐입니다. 사랑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바치며, 당신을 이해하겠다고 말하는 달콤한 말 속에는 들뜬 마음만이 있을 뿐 공허합니다. 환상의 말들이 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현실에서 사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새롭지 않다는 이유로, 별 거 아닌 이유로 사랑을 저버립니다.
하지무도 그렇습니다. 그가 메이의 무엇을 알았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깊숙이 알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환상에 젖은 상태에서 관계가 깨져버리고, 환상이 사라지자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무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개체로 삼습니다.
유통기한, 어떤 물건이 널리 쓰일 수 있는 기한.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확 달아오른 감정은 식기 마련입니다. 분명 다시 달아오를 수 있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무와 메이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다했습니다. 달아오른 감정뿐이었을 그 사랑에 환상의 유통기한을 현실이 고했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너무 고통스럽기에 새로운 환상을 찾습니다.
마약밀매꾼 여자는 환상 그 자체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삶을 방황합니다. 그녀의 방황은 늘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방황 끝에 목적지를 찾아야만 하는 방황의 유통기한. 이번에는 그 유통기한을 방황이 넘어설 듯합니다. 유통기한의 마지막 날, 그녀는 대담해집니다. 그리고 지칩니다. 지쳐버린 환상은 환상을 찾는 하지무를 떨쳐내고 싶지만,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남녀가 만났을 뿐인 밤이 지나고, 여자는 환상을 떨쳐내고 유통기한을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한 마디 삐삐를 칩니다. 생일 축하한다고. 유통기한 없이 살아가던 남자는 다시 긴 유통기한에 빠져듭니다. 가질 수 없는 관계이기에,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기에 건넬 수 있는 말.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어떤 이들은 숲 안으로 들어갑니다. 길을 헤맬 걸 알면서, 방향을 잃을 것을 알면서. 그들은 숲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른 곳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긴 헤맴 끝에 길을 찾아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방에 보이는 모든 것이 슬픈 남자가 있습니다. 경찰 번호 663. 그 또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환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표면적인 것이든 감정에 불과한 것이든 열렬하고, 무겁습니다. 그는 긴 시간 그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그의 방이 슬픈 이유는 물건으로 가득 찬 그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 오히려 부재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좋아했던 그녀가, 이제는 그의 곁에 없는 그녀가 방을 메웁니다.
663을 좋아하는 페이는 방을 하나씩 바꾸어 나갑니다. 그녀의 흔적을 없애고 자신의 흔적을 집어넣습니다. 여전히 663을 붙잡은 환상을 걷어내고, 자기의 환상을 집어넣습니다. 이미 길을 잃은 663은 페이의 환상을 그녀의 환상으로 착각합니다. 어지러움 속에서 길은 이미 바뀌었지만, 그는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가 사람의 마음속 목적지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정말로 닿아야 할 목적지로 데려가 줄지 모릅니다.
환상이 바뀌었음을, 누군가 바꾸어주었음을 663이 깨닫습니다. 그의 환상은 앞에 있는 누군가를 향합니다. 환상에서 현실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페이라는 사람과 마주보고 같이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두렵습니다. 둘이 마주하기 전엔 환상의 관계였지만, 마주하고 나서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간을 갖습니다. 그 감정을 둘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표현하고 전달하였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마주한 둘은 환상을 상상하며 현실에서 만납니다. 둘은 이제야 사랑을 합니다. 숲에서 하나의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헤매도 슬프고 두렵지 않습니다. 둘이기 때문에. 그 둘임을 놓치고 싶은 남자는 이제 하나의 목적지를 말합니다.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들의 이 말이 현실이 될지 환상이 될지는 숲을 통과해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아니면 계속 헤매다 길을 잃어버리느냐에 있습니다.
세운상가도 중경맨션도 중심부에 있지만, 변두리에 있는 공간입니다. 이 이질적인 공간들은 현실에서 벗어난 낯섦을 제공합니다. 이 낯섦은 진실을 꿰뚫기도 하지만, 환상으로 모든 감각을 덮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은 일상에서 먼 감정입니다. 반복의 일상에서 낯섦을 제공하는 감정이죠. 이 낯섦은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현실을 전부 환상으로 뒤덮어버리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섦에서 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환상을 좇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운명에 비유하고 ‘빠져든다.’라고만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그런 환상과도 같은 감정이지만, 가장 일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합니다. 늘 함께하고 반복해야만 하는 것.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함에 있어서 계기는 빠져듦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 빠지는 것만을 반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변하기만 하는 그 사람을 불안정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현실에 가까운 사랑은 길게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사랑에 유통기한이라는 말부터가 환상입니다. 사랑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기한이 정해질 수 없으니까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이야기하여 다가가고, 계속 함께해나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쌓여야만 사랑의 기한은 길어집니다. 그것은 하루도 못 갈 수도 있고, 무한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환상이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만, 마지막에는 현실이 더 아름답고 긴 진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같은 행선지이고, 그러기 위한 사이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