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가. 내 기억들

초속 5cm

by baekja

“문득 떠오른 기억에 눈물이 난 적 있나요?”


눈물은 흘린 적이 없습니다만, 가끔 가슴 아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기억을 만나면 길을 걷다 멈춰 섭니다. 저는 대부분의 기억을 공간에서 찾습니다. 어떠한 공간을 보면 기억이 떠오르는 식이죠. 그래서 제 기억의 대부분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글을 써온지 7년이 된 요즘은 공간 뿐만이 아니라 글에서 제 기억을 찾고는 합니다. 7년 동안 뭐가 됐든 글을 꾸준히 써온 덕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글을 어딘가에서 찾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다시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뭔가 부끄럽고 대면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제 마음을 담은 글은 더합니다.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받는 게 어려워서 써두고 깊은 곳에 담아만 두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다 올해 좋은 계기로 예전에 썼던 글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7년의 세월 속에서 쌓인 글들의 바다를 헤매던 중 완전히 잊고 있던 하나의 시가 파도처럼 제 앞으로 왔습니다.


시를 좋아하지만, 늘 풀어쓰고, 설명하는 것에 익숙한 탓에 시를 잘 쓰지는 못합니다. 마주했던 그 시도 평범하게 보면 잘 쓴 시는 아니지만, 감정이 강렬하게 느껴져서 무척 놀랐습니다. 년도를 확인했습니다. 2022년, 코로나의 마지막, 대면 수업의 직전. 겨울의 눈에 그리움이 가득 담겼던 그 시에서 2022년에 어떤 공간에 있었는지 떠올렸습니다.


코로나로 5, 6, 7학기를 날려버린 군 복학생은 8학기가 되어서야 대면 수업을 두 개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수업에서 최고학번을 달성해버린 16학번은 조용히 다니면서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습니다. 그 수업을 오가며 마주했던 공간들. 인문대 건물에서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버려두고 오고자 했으나 결국 헤매기만한 나의 깊숙한 곳에 있던 기억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억, 추억이었습니다.


“요 몇 년 동안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대고 싶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하는 건지도 모르고

거의 협박 같은 마음이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지도 모르면서…“


2022년의 3년 전 저는 무언가를 버렸습니다.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하지만 매우 닿고 싶었던 꿈을 향해 그 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관계는 끝이 났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모두 풀어내기 위해 매일을 글에 몰두했고, 인문학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무엇에 닿고 싶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 꿈의 현실이 가혹함을 그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꿈을 이루기보다는 그냥 그렇게하지 않으면 완전히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무너질 것 같아서 계속했습니다.


방향성이 없는 행위에는 감정이 없고, 꿈이 없습니다. 서른이 가까운 토노 타카키의 모든 행위에는 방향성이 없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일을 하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어딘가에 도달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그 외 모든 상황은 회피합니다. 그의 마음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그렇게 살아야할 것만 같다고 채찍질하는 마음의 근원이 있었을 겁니다. 바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시노하라 아카리입니다.


같은 전학생의 동질감, 과학을 좋아하며 도서관에 자주 있었던 공통점까지. 그 둘이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평생 함께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둘 다 멀리 떨어져 전학을 가게 되었고, 아예 닿지 못할 거리로 벗어나기 전, 그 둘은 만나기로 했습니다. 눈이 쏟아지는 겨울, 4시간 연착된 열차를 둘 다 기다렸고, 만났습니다. 그 마지막 겨울, 봄에 눈을 날릴 벚나무 앞에서 둘은 미래를 약속하고 갈라졌습니다.


타카키와 아카리의 긴 시간은 흘러 어른이 되었습니다. 일만 할 뿐 자기의 마음을, 추억을 돌아보지 못한 타카키와 달리 아카리는 그 모든 시간을, 추억을 소화시켰습니다. 여전히 우주를 좋아하는 서점 직원인 아카리의 입에서는 이미 지난 일이라는 듯이 말이 흘러나옵니다.


“추억이 일상이 되었어요.”


감정을 미친 듯이 불러일으키는 추억을 타카키처럼 저도 마주보지 못했습니다. 20대 초반 나를 뒤흔들어놓았던 그 시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빠져버리고, 비어버린 마음속에서 아마 최악의 선택을 했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다 소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관계 후에 남은 것은 압도적 반성. 그리고 그제야 꿈에 여전히 가끔 아주 오래전 그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타카키도 여전히 먼 곳만을 바라봅니다. 카나에는 그런 타카키를 좋아합니다. 둘의 시선은 맞을 수 없습니다. 꿈에서 타카키는 초원 위에서 아카리와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는 여전히 과거에 있습니다. 그 과거에서 미래로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온전한 고민은 아닙니다. 과거의 감정이 미래에 어디까지 도달할지 되묻는 것이므로. 그렇게 어른이 된 타카키는 흔들리고, 또 흔들립니다.


꿈을 마주하고, 새로운 관계를 끝내고 나서야 여전히 기억에서 감정이 느껴짐을, 그것이 추억으로 남아있음을 가슴 깊이 느꼈습니다. 조금 깊이 침잠했고, 채 끝나지 못한 감정들을 정리했습니다.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버리고 온 그것은 저를 계속 붙잡았고, 그걸 알지 못한 채 헤매고, 헤매이다 그제야 그 이유를 확인했습니다. 감정은 기억을 놓아주기 시작했고,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졌습니다. 자동차처럼 시속 200km로 나가기 위해 버려둔 그것들은 초속 5cm의 벚꽃잎처럼 흩날리며 제가 멈춰있게 하였습니다. 그 멈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길고 긴 헤맴 끝에 약속의 날에, 약속의 장소에 타카키는 도착합니다. 과거에 묶여 있으므로. 하지만, 아카리는 없습니다. 과거를 벗어나 현재의 행복을 찾아갔기에. 그 차이를 확인하고나서야 타카키도 과거를 향한 현재의 회피에서 벗어나 현재를 마주봅니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 그는 기차 건널목에서 누군가가 없음을 확인하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현재를 마주하려고 노력했지만,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작년 9월 중순 친구 결혼식에서 걸어가다 정말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2초 정도 마주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마음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고, 그렇게 추억이 기억이 되었음을,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내 속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꿈에 더 이상 그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억 또한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밀려오는 파도 같은 다른 기억으로 밀려납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기에 드디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혹은 제대로 제 의지로 멈춰설 수도 있겠죠. 그것을 명확히 깨닫게 해준 기억이 아마 헤맨 시간 그 이상을 저와 함께할 겁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나아갈 길도 쉽지 않겠지만,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분명 괜찮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