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음’에 대하여

<노트북>

by baekja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 <호수>


신촌역을 지나다니며 늘 보았던 시다. 누군가를 ‘보고 싶음’에 대하여 이처럼 강렬하고 섬세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정말 짧은 말이지만, 이보다 더 누군가를 보고 싶음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보고 싶은 마음이 저렇게 큰데 눈을 감아 버리면……. 아마 도움은 딱히 되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만 커질 뿐.


영화 노트북에서 노아와 앨리는 정말 뜨거운 사랑을 한다. 매일 다투면서도 서로에게 미쳐 있는 사랑. 도시 아가씨와 시골 청년이라는 현실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랑. 늘 붙어 다니고, 늘 싸우면서도 서로를 절대 놓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서로가 서로와 함께할 때 나로 명확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이런 불같은 사랑을 끊어내는 것은 모든 것을 식혀버리는 물 같은 현실이다. 너무나 큰 차이가 보이는 그들의 현실은 꿈과도 같은 그들의 사랑을 끝내버린다. 앨리는 뉴욕으로 떠나고, 노아는 앨리가 더 잘 되어야 하기에 붙잡지 못한다.


이성이 붙잡는 현실 속에서 마음은 끝나지 않기에 노아는 1년을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들을 막는 앨리의 어머니가 편지를 모두 가로채 버린다. 그런 좌절 속에서 앨리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약혼하며, 노아는 술로 현실을 도피한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에서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은 서로이다. 서로 ‘보고 싶다.’ 신문에서 노아를 보자마자 앨리는 달려온다. 약혼과 첫사랑 사이에서 앨리가 택하는 것은 첫사랑이다. 약혼을 했음에도 보고 싶어서 노아를 향해 달려왔으니까. 이 감정은 끝까지 남아 퇴행성 치매 속에서도 단 한 사람을 계속 떠올리게 만든다. ‘보고 싶다’는 말은 이해를 넘어 어떤 초월의 영역에 까지 다다른다. 노아가 하는 이 말처럼.


과학이 포기한 곳에 신의 손길이 내린다.


처음 집을 나와 멀리 평창에서 자취를 하면서 고독했던 적이 있다. 너무 외로워서 이곳저곳에 괜히 연락을 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방이 무척 어두워서 감당할 수 없었다. 다만, 그때는 누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불특정 누군가가 생각나기 보다는 그냥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이니까. 유튜브와 함께 지독했던 어둠과 고독을 걷어내었다. 물론 종종 찾아오는 한기에 고독함이 완전히 몰아내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많이 힘들 때면 엄마가 보고 싶었다.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받아주는 엄마가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평창에 찾아온 엄마는 그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받아주셨다. 그 따뜻함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다. 그래서 종종 생각이 든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 ‘따뜻함’이었을까? 아니면 내 엄마라는 그 존재 그 자체였을까?


사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에서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그 사람 자체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우리 엄마는 엄마로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따뜻함과 엄마를 떼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단 한 번 엄마의 전화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 전화에서 우리 엄마가 아닌 그 사람 자체의 모습이 보였었다. 처음으로 엄마를 제대로 위로해 보았다. 늘 엄마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 난 엄마에게 소중하고도 보고 싶은 아들이었다. 근데 존재 OOO으로 보이는 것일까?


이런 걱정은 기우일지도 몰랐다. 엄마는 사실 아들 이상으로 나라는 존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간만에 전화해서 몇 가지 물어봤을 때 엄마는 나의 특징을 당연하다는 듯이 나열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하셨다. 아, 엄마는 나를 보고 싶어 하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의 무게감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말의 무게감이 무척이나 무거울지언정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과 경험을 모두 표현하기에 말은 너무나 가볍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명확하게 전달하기에 말만한 것이 없다. 그런 말들 중 ‘보고 싶다’가 있다. 앨리가 몇 번이고 기억을 잃어도 계속 찾아가 과거에 사랑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아만큼 ‘보고 싶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가 있을까? 말은 가볍지만, 그 말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은 꾸준한 노력과 행동이 아닐까 싶다. 가볍게 그냥 적당히 말했던 ‘보고 싶다’가 요즘 무겁다. 그럼에도 내뱉어야만 한다. 그건 눈에 보이는 사실이 아니니까.


사실을 표현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 가능하지만, 마음은 눈으로 확인 불가능하니 표현이란 것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기에 표현을 해야만 알 수가 있고, 명명백백해진다. 마음이 어렵고 잘 모르겠지만 말로써 계속 풀어내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손바닥으로 가리려 했으나 호수만 해진 그 마음을 어떻게든 토해내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저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니까.


그렇다면 ‘보고 싶다’는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 사람의 얼굴을 말 그대로 보면 끝나는 것일까? 물론 말 그대로는 얼굴만 보면 해결되는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 그 너머의 의미를 마주한다는 의미가 크지 않을까? 예쁜 사람을 보고 ‘아, 한 번쯤 보면 좋겠다.’와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보고 싶다’는 의미가 다르다. 정확한 ‘보고 싶다’의 의미는 자기가 생각하는 ‘외적인 미美를 보고 싶다.’가 아니다. 그 사람 자체를 마주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확히는 그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서로의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한다. 오래보더라도 그 사람의 존재를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고려함에도 지금 당장 그 사람의 존재가 필요할 때, ‘보고 싶다’를 외칠 수 있지 않을까? 노아와 앨리는 늘 둘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나로 서있게 하는 사람이 둘이었으니까. 일생을 건 그 ‘보고 싶음’이 마음속에 깊숙이 박혀 들어온다. 호수의 깊이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의 존재를 갈구하는 마음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렵게 나에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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