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들>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입니다. 전시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몇몇 목소리는 제게 닿습니다. 그 목소리에 제 목소리가 얹히고, 대화가 성립합니다. 서로의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넘어와 귀의 고막을 떨리게 하고, 청각 세포의 신호를 뇌가 받아 우리가 익히 아는 기호들로 전환합니다. 의미가 서로 통하는 대화. 목소리가 전달되는 평범한 대화입니다. 하지만,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그 목소리를 아예 막아버리거나 목소리를 사람의 인식에서 지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기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한때는 아예 내지 못했던 목소리, 간신히 내려했을 때 누군가 완전히 막아버린 목소리, 간신히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인식 밖에 있던 목소리. 빨갱이라는 이름하에 목소리 자체가 사라졌었고, 시간이 지나 목소리를 내려했으나 길고 긴 독재 속에서 목소리가 전부 막혔으며, 4·3의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이 밝혀졌음에도 공식적 기록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인식 저편에서 불러지지 못한 여성의 목소리. 이 영화는 그 목소리들을 담았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것은 말입니다. 말로 내뱉어지는 것은 4·3의 기억입니다. 기억들은 말로 내뱉어져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끔찍하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야기들을 드러냅니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겁탈을 피해 조혼이나 강제결혼을 해야 했던 이야기, 무장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을 쌓느라 고생했던 이야기, 남자들이 전부 죽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던 이야기, 임산부를 나무에 매달아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강간을 하고 나서 입막음을 위해 학살을 했던 이야기까지. 말로 뱉어진 기억들은 하나의 영상으로 재현되어 우리의 앞에 섭니다.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 이야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 사라질지 모릅니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담지 못하니. 그래서 기억은 그것을 이어갈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 끔찍한 기억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간신히 우리에게 닿은 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저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목해야 합니다. 이야기가 주는 표면층의 끔찍함을 넘어 지금의 시대와 맞닿을 수 있는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말 너머에 있는 목소리들. 그것은 오히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나오는 목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침묵, 한숨, 눈물. 그저 일상에서 말을 하기 싫어 선택한 침묵, 일상의 지루함 끝에 쉬이 나오는 한숨, 하품하다가 튀어나오는 눈물의 가벼움과는 감히 비교가 불가한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 영상에 드러납니다. 영상을 넘어서도 고통을 느끼게 하는 그 침묵, 한숨, 눈물에 4.3의 진실이, 당대로부터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여성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조차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국가 폭력의 무자비함에 목소리의 자유조차 뺏겼던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는 우리가 기록이 아니라고, 말이 아니라고 무시해 왔던 역사의 진실 그 자체입니다. 4·3 그 순간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이들이 가슴 깊이 묻어왔던 감정의 표출은 시간 속에서 깊어져만 간 공포이며, 일상에서 마주해야 하는 똑같은 공간에서의 고통이었습니다.
역사는 기록입니다. 제도적 언어를 사용한 공식적 기록. 하지만, 4·3사건의 공식적 피해자에 성폭력 피해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거기에 강제 결혼, 살기 위해 강제로 해야 했던 노동으로 입었던 피해들을 생각하면 사실 4·3사건의 진상을 역사는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들은 이 피해를 말했거나, 혹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표현했습니다. 증언으로 기억이 전부 재현되지 못하는 말의 불완전한 결여와 행동과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증언을 넘어서는 기억의 초과가 이 영상에, 목소리들에 담겨 있습니다.
목소리들을 담은 이 영상조차 언젠가 지워져 사라질지 모릅니다. 길고 긴 세상의 순환 속에서 핍박받았던 제주 4·3의 여성사도 마모되어 참혹한 기억이 먼지가 되어 흩어져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무정한 순환의 반복에서도 영원을 담보하는 자연이 있습니다. 과오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자연. 원시의 돌과 나무가 뒤덮인 곶자왈, 섬을 향해 달려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 모든 것들을 흔들면서도 보듬어주는 바람까지. 제주의 자연은 모든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채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만, 어쩌면 기억하지도 못할 목소리들을 담아 먼 미래까지 가져다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