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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타임 Jan 20. 2024

오르골

여행지에서 한밤중 숙소의 적막이  항상 좋다. 자정쯤 하나같이 동시에 잠든 듯 조용한 리조트 여기저기를 거닐다가 순찰 중인 가드너와 잠시 목례로 스쳤다. 깊은 곳에 가지 못하게 할 줄 알았더니 내 걸음을 막는 대신 멀찌기서 걸음의 방향을 그저 지켜만 봐준다. 이렇게 까지 큰 규모의 리조트인지 모르고 예약을 했다. 그 덕에 잠을 청하지 못하는 밤은 리조트를 하염없이 걸었다.   

여행 셋째 날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나트랑은 해변이 유명한 관광지지만 숙소에서는 강이 보였고 강너머로 현지인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난 이 풍경이 첫날부터 마음에 들었다.  동이  틀 무렵 무슨 축제처럼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한참 새벽하늘을 기웃댔다. 강이 있고, 고깃배가 있는 마을이니 물고기 경매시간이려나.., 아님 바다의 용왕 같은 존재에게 그날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라도 드리는 시간일까.
일행이 없는 여행이었다면 관광지를 한 곳 빼고서라도 저 소리의 근원을 분명 찾아가 봤을 텐데...
그렇게 숙소에서 나만 아는 풍경을 만들며  몇날밤을 뜬 눈으로 지냈다.

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감동의 질이 틀려진다. 그해 나트랑에 난 동생의 배우자가 될 사람과 함께 했다.
난 최악의 메이트를 만났고 내게 최악의 메이트가 어떻게 동생에게는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일 수 있는지 온갖 상념과 걱정에 사로잡혔던 여행이었다.

사랑은 때로는 피라미드 성의 가장 꼭대기에 앉아서 노예를 부리는 폭군처럼... 사람을 한없이 힘없게 한다.
그를 사랑한 동생은 그의 단점들을 눈감았고, 동생을 사랑한 나는 동생의 선택에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라미드의 가장 최하위에 내가 있는 기분으로 매일밤을 서성였던 그 해 여행.
여행 후 이듬해 가을. 동생은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1년 2년 3년 4년...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든 동생과 그.
그는 동생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어줬다. 동생은 그와 함께 사는 게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단점만 보이던 내 눈에 이제는 장점도 많이 보인다. 나트랑에서 내게 보여줬던 모습이 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는 다행히도 그 모습만 가진 게 아니었다.
사랑의 피라미드는 뜻밖의 행복을 줬다. 하위층일수록 상위층이 행복할 때 기쁨을 몇 배로 받게 해 줬다. 그리고 그 기쁨에는 늘 안도감이 따라왔다.  

제부가 오르골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예전에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매번 제부에게 명절 선물을 해 왔다. 지난 설날 선물을 고르다가 그 사실이 떠올랐다. 오르골을 사 본 적이 없었기에 막상 찾아보니 고르기가 쉽지 않은 물건이었다.
어렵사리 디자인과 크기와 음악을 고르고 각인도 새겨 넣었다.
"영, 모든 날에 평안이."

늘 동생과 함께 행복하길 빌어줬는데 이제는 '동생과 함께'라는 말을 빼도 진심이 실린다. 난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

우리가 가족이 된 후로 또다시 설명절이 다가온다.
지인들에게 줄 명절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매해 숙제와 같은 일이지만 특별히 그의 선물을 고르는 일 내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뭘 선물할까 뭘 해야 좋지 굳이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무슨 큰 숙제처럼 떠벌이며 고민에 슬슬 들어간다.
어느덧 그건 우리 가족의 놀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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