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목과정의 첫번째 퇴고버전: 서른 한번째 이야기
“한옥짓는 현장에서 일해보니까 어때? 한옥학교에서 배운 것하고 많이 달라?”
2022년 10월말 한옥학교 동기들을 다시 만났다. ‘한옥학교’ 과정이 끝나고 반년만에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횡성군 둔내면에는 며칠전에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동료들은 매년 한번씩 얼굴을 보자고 했던 졸업식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나와 종석이가 지내던 횡성군 둔내면으로 온 것이다. 종석이가 아내와 같이 운영하던 ‘아지트’라는 식당이, 그 날의 모임 장소였다.
진주에서 한국화약의 화약판매점을 운영하던 일현이도 5시간이 넘게 운전해서 도착했다. 호림이도 일하고 있던 세종시에서 왔고, 정원이는 부평에서, 정목이는 삼척에서 왔다. 한옥학교 동기 9명중 5명이 모였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들이라 모두들 반가워했다.
한옥학교 졸업식이 있었던 2022년 4월초, 코로나로 나는 자가격리 중이었다.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종석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별인사를 하러 집으로 오겠다는 거다. 나는 종석이를 포함해서 몇 명만 오는 줄 알았는데, 동료들 전체가 내 집에 왔다. 모두들 짐을 싸서 각자의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것이다.
갑작스럽게 모두들 찾아주니까, 고맙고 기분이 좋았다. 종석이가 나에게 수료증과 우등상장, 그리고 상품을 전달해 주었다. 내가 회장 역할을 해서 우등상을 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등상장은 처음 타본 것 같다. ㅎㅎ 과정을 잘해서 줬다기 보다는 동료들과 좋은 수업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준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코로나에 걸려있는 탓에, 동료들을 집안으로 들이기 어려웠다. 마당에 있던 동료들도 거실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나와 자연스럽게 대화하였다. 우리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현이는 파주로, 종석이는 인제로, 호림이는 속초로 일하러 간다고 했다. 이들은 우수한 학생들이어서, 한옥을 짓는 현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당분간 쉰다고 한다. 서로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주면서, 그 해 10월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다.
한옥짓는 현장에 제일 먼저 취업을 한 것은 종석이였다. 실력도 좋지만 젊어서,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옥학교를 졸업하고 한달도 채 되지 않아서, 종석이는 한옥을 짓고 있던 강원도 인제로 갔다. 그곳 작업장에서는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해서 오후 5시나 6시에 끝났다. 산속에서 사찰을 짓는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들끼리 하루종일 함께 지내면서 숙식도 같이 했다.
정부의 예산으로 짓는 공사이고 전문가들이 하는 작업이라서, 우리가 배운 과정하고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부자재들간을 연결해주는 ‘맞춤’이나 ‘이음’을 할 때면,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다듬었다. 부자재를 적합한 크기로 다듬는 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우리 작업 시간의 절반도 채 걸리지 않았단다.
40대 중반인 종석이는 작업장에서 막내였다. 아직 초보라서 서툴기는 하지만, 지시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일 솜씨도 좋았다. 그런 종석이를 작업팀장이 마음에 들어 했다. 기술이 뛰어난 다른 동료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팀장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종석이는 빠르게 작업팀에 적응해나갔다. 하지만 종석이는 얼마전에 한옥 목수일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임금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작업팀장이나 팀원들이 잘 해줘서 좋았어. 그렇지만 얼마 전에 팀장님에게 급여를 올려달라고 요청했었는데, 내가 원하는 만큼 올려주기 어렵다고 하더라고.”
인턴과정 3개월동안은 하루 일당이 12만원이었고, 그 후에는 14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 세끼와 함께 잠자리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7만원이상을 받는 것이다. 종석이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었다. 결국 5, 6개월정도 작업에 참여했던 종석이는, 그 작업이 끝나자 일을 그만 뒀다.
“전문가들은 역시 다르더구만. 서까래를 만들 때, 가운데 부분은 블룩하고 땅을 향하는 부분은 좀 더 두껍게 만들잖아. 그 비율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데도, 순식간에 다듬어 내더라고.”
파주의 한옥 작업장에 취업했던 일현이도, 전문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감탄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문화재를 수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옥으로 지어진 문화재 공사를 할 때는, 정부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부자재의 종류와 상태뿐 아니라 한옥의 부위별 크기, 두께, 기울기 등 많은 부분에 대한 작업기준이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정밀하게 일을 해야만, 문화재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문화재가 자연환경에 잘 견뎌내야 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미적인 만족감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까다로운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리라.
정부가 정한 기준에 맞춰서 작업하다 보면, 작업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작업기간은 비용과 직결된 부분이기에, 문화재 보수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수준이상의 전문가들이었다. 일현이에게는 정확도뿐 아니라 작업 속도도 따라가기 힘들었단다. 그래도 배우는 것이 재미있어서, 수개월동안 일을 했다. 이 기간동안 배운 솜씨로 문화재 수리 기능사 자격증까지 따기도 했다.
하지만 일현이도 수십년동안 다녔던 한국화약에서 진주에 있는 화약 판매점장 자리를 마련해주면서, 한옥 작업팀을 떠났다. 50대 중반의 일현이에게는 한옥 목수의 낮은 임금수준뿐 만 아니라 육체노동 자체가 힘들었다.
당초 호림이는 오대산 월정사의 문화재 수리를 하는 공사팀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원래 자신의 직장으로 돌아갔다. 아직 30대인 호림이가 보기에는 한옥 목수라는 직업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급여 수준 때문이었다. 호림이는 평창 한옥학교에 오기전에 아버지의 회사에서 아파트나 전원주택 단지의 인테리어 사업을 했었다. 그 곳에서의 임금수준이 한옥 목수보다 훨씬 높았다.
요즘은 한옥을 짓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건축시장이 그다지 크지 않다. 한옥 목수의 임금수준이 아파트 등 다른 형태의 건축 작업장에서 일하는 목수보다 낮은 이유일 것이다. 건축시장의 규모가 작은 것은 한옥의 건축 비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옥에 쓰이는 목재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마저도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가격이 올라갔다. 한옥 건축시장이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유야 어떻든 평창 한옥학교에서 공부했던 10명의 동료들 중에서 한옥 목수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 지원사업으로 운영하는 한옥학교라는 측면을 감안하면, 결국 성과가 없는 것이다. 한옥학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한옥 목수라는 일자리의 구조적 문제였다. 한옥을 짓는 수요가 줄어들다 보니까, 높은 급여를 제공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다.
‘아지트’에는 10여개의 테이블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만 유일하게 한쪽만 트여 있는 방 구조였다. 종석이는 우리들을 그 곳으로 안내했다. 서로 다른 지방에서 출발한 동료들이 하나 둘씩 도착하였다. 의정부에 살고 있는 정원이가 가장 먼저 왔다. 나와 종석이는 반갑게 정원이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병간호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별다른 일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예요.”
정원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한옥학교 다닐 때도 주말마다 어머님에게 가봐야 했던 그였다. 오랜 병간호로 인해 지쳐 보였다. 그런 정원이를 위로해주고 있는 사이에, 일현이, 호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목이가 도착했다. 가장 가까운 지방에서 출발한 정목이가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이다. 정목이가 도착할 때쯤, 우리들은 이미 취해가고 있었다.
한옥 현장을 경험했던 종석이, 일현이의 이야기에 가장 심취했다. 우리들 공통의 관심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몇 개월만에 작업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조그마한 삶의 변곡점을 겪은 후, 새로운 생활 터전에 잘 안착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의 역동성이 느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가 재미있고 신비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