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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빛 Nov 30. 2021

8. 가족인데 이것도 못 해줘?

 “제 말 잘 들으세요.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닐 수 있어요.”

쌍꺼풀진 큰 눈을 가진 교수님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저희 친정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면서 저한테 참 많은 욕을 하셨어요. 네년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말도 하셨고 심지어 엄마에게도 이년아 저 년아 하고 돌아가셨어요. 나를 사랑했던 우리 아빠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해요.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환자도 있지만 모든 환자가 그렇지는 못해요. 지금 환자분이 그런 상황이에요. 안타깝게도 여전히 ‘부정’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에요. 제가 곁에서 지켜보니 가족끼리 간병하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아서 환자에게 간병인 이야기를 꺼냈어요. 안타깝게도 굉장히 노여워하셨어요. ‘가족인데 이것도 못해주냐’면서.”


 나는 대답 없이 아버지의 진료 차트가 띄워진 모니터를 응시했다. 알 수 없는 의학용어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고 그 옆으로 희뿌옇게 뒤덮인 아버지의 폐 사진이 보였다. 참으로 잔인한 병이었다. 교수님 말씀처럼 내가 알던 아빠는 가족의 희생을 결코 당연시할 분이 아니었다. 자인하기 그지없던 아버지는 본인이 희생할지언정 가족이 고생하는 것은 절대 원치 않던 분이었다. 외벌이로 빠듯한 가계 상황에서도 자식 셋을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까지 다 보내주시면서도 어머니 손에 물 한 방울 묻게 하지 않은 분이었다. 정말 오롯이 가족만을 위해 아버지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터로 나갔고 그런 희생을 슬프게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암 확진을 받고 약 8개월을 더 회사에 다녔다. 아마 체력이 허락했다면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사와 관계없이 병세가 깊어져 결국 아버지는 퇴사했지만 짧다면 짧은 8개월 동안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꼬박꼬박 건네면서도 사천만 원이라는 목돈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함께 건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위해 티셔츠 한 장은 구입하지 않을지언정 남겨질 어머니의 경제력을 걱정하는 사람.


 지극히도 평범한 가정이었다.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풍요롭지 않았지만 자라면서 친구들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거나 우리 집이 못 산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다섯 식구의 짐을 혼자 짊어진 채 버텨낸 아버지 덕분이었다는 것을 참 늦게 깨달았다. 어렵사리 취업시장의 문을 통과하고 직장에 자리를 잡은 뒤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가 짊어지고 있던 현실의 무게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무겁다 못해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애면글면 버텨왔을 그를 생각하니 철없던 과거가 형형한 별빛처럼 하나둘 떠올랐다.




 지금은 키즈폰 시장마저 활성화되어 있는 시대이지만 90년대생인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핸드폰이 없었다. 학교에는 핸드폰을 선물 받고 그것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한 번은 친구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핸드폰이 사라져 교실이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던 만큼 핸드폰이 흔하지 않고 귀했다. 나도 무척이나 핸드폰이 가지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50만 원에 달하는 스카이 핸드폰을 사달라고 집요하게 졸랐다. 아버지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핸드폰의 가격이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내게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욕망뿐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내게 결국 고가의 핸드폰을 사주었다. 더 이상 조를 것도 없는 허리끈을 더욱 졸라매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내 손에 고가의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나는 참 지독하게도 철이 없었다.


 ‘가족인데 이것도 못해주냐’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이 컸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말이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가장이라는 이름 아래 책임지고 버티고 견뎌낸 지리멸렬한 순간들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을 때도 그저 참았을 것이다. 가족을 지켜야 하고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까. 어쩌면 아버지는 누구보다 쉬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는 은퇴를 앞둔 시점에 찾아온 지독한 불청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아버지께서 30년 가까이 지켜온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 책임감이 가진 무게에 나를 돌아본다.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무엇이든 하겠다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점점 여트막해지는 아버지와의 시간을 결코 후회 없이 보내겠다 다짐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피하고 외면했던 나를 반성한다. 아버지가 참 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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