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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빛 Feb 08. 2022

16.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들

 해거름이 질 무렵 어둠이 빛을 조금씩 밀어내기 전 찾아오는 황홀한 순간을 애정 한다. 때로는 쨍한 오렌지빛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파스텔 색감을 띈 우아한 분홍빛 하늘이 찾아오는 그 순간을 나는 애정 한다. 상념에 빠지는 날이면 지나간 시간 조각들이 고개를 들고 내게 조심스레 다가온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명징하게 떠오르는 순간의 대부분은 황혼 무렵이었다. 가슴이 뻐근하고 가끔은 눈물짓게 하는 그 시간이 나는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수많은 생명에게 자신의 온기와 빛을 내어주고 어둠에 자리를 내주기 직전, 오묘한 빛을 뿌리고 사라지는 그 모습은 마치 이별의 순간 건네는 위로를 닮았다.


 황혼은 이별이지만 재회를 앞두고 있기에 슬프지 않다. 오히려 아름답다. 어린아이가 대상 영속성을 배우고 까꿍 놀이를 즐기듯 재회를 앞두고 있다면 이별은 되려 기다림의 즐거움을 준다. 그러기에 견딜 수 있다. 어둠 뒤에 빛이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 빛은 다시금 나를 따듯한 온기로 적셔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하지만 어떤 이별은 영원이다. 과학계에서 주장하는 질량 보존의 법칙은 차치하더라도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도 있다. 이별의 경험이라곤 연인과의 이별뿐이었던 내게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은 황혼 뒤 다시 해가 떠오르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별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어떤 이별은 태양의 마지막 인사처럼 황홀하지만 어떤 이별은 온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나를 얼어붙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이런 내게 아버지는 연습할 기회를 주었다. 이별을 배우고, 이별을 곱씹고, 이별을 마주하고 이별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나는 육신의 소멸보다 두려운 것은 마음의 소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육신은 마음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가 내게 건넸던 마음과 감정은 영원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왜곡되고 내가 그에게 느꼈던 감정은 휘발되어 흩어진다. 나는 감정이 가진 휘발성이 두려웠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을, 나의 마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서툴고 부족한 글솜씨로 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이별을 연습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 마음의 주인에서 벗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소화시키며 풀리지 않는 감정들을 배설했다. 후련함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아버지의 암 선고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내게 비상 깜빡이를 켜고 갓길에 정지하라는 신호와 같았다. 고속도로에서 멈춘 나는 내 옆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다른 차들을 지켜본다. 언제 다시 출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위험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왜곡의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후련함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하지만 나는 기록하는 쪽을 택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온전히 그만을 생각하며 적어 내려간 글이 내게 위안을 줄 것이라 믿었기에.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다. 어떤 상황에도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건넨 날 선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고, 그의 외로움을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날들이 있다. 마음도 결국은 뇌에서 일어나는 사고에서 비롯되니 내 말은 틀린 명제일 수 있겠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마음은 선뜻 이별이 준비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도 나는 이별을 연습하지만 여전히 그를 보내기엔 자신이 없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싶다.      


 아무래도 다음 병원 진료에서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올 것 같다. 그동안의 연습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온 이별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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