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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빛 Jan 20. 2022

15.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아버지의 품 안에 파랑새가 날아들었다. 2021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과 달리 아버지는 2022년에도 어김없이 떠오르고 지는 해와 달과 함께하고 있으며, 그런 자연의 품 안에서 깨어나고 잠들고 있다. 담당 교수님조차 아버지처럼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혹여 폐암 환우분께서 혹은 폐암 환우를 가족으로 둔 분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치료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 지난한 치료과정 속에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늘 낮은 수치를 유지했던 혈중 산소 수치가 안정되었고 이에 아버지는 가정용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지 않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자연히 삶의 질이 개선되었고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던 민머리에는 새까만 머리카락들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날들 속에서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는 일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공간을 환기하는 것만큼 상쾌하고 후련한 일이었다. 우리 가정에 다시금 찾아온 목가적인 순간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품에 날아든 파랑새를 귀하게 보살피고 싶었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도 마음의 근심을 모두 덜어내지는 못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미 여러 항암제를 사용했고 약제들에 내성이 온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약은 비급여 약제뿐 이였다. 아버지가 처방받은 약은 유한양행의 ‘렉라자’로 작년 7월에 출시된 신약이다. 우리는 신약 처방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미 같은 기전인 타그리소를 복용한 이력이 있기에 급여처리는 불가하였다. 이에 우리는 한 달 약 600만 원의 약값을 지불하고 있다. 가계의 생활비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매달 약값으로 지출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하면 절로 몸과 마음이 휘지어온다. 아직 가계경제가 핍진한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낙천적인 미래만을 꿈꾸기에 약값은 재난적인 수준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30년 동안 직장 생활하며 모은 돈이 다 사라지면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자식들이 십시일반 모아서라도 약값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일부 재산을 물려줘야 하니 모은 돈을 약값으로 다 쓰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어느 정도 치료 중단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돈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때때로 일확천금의 꿈을 꾸기도 하지만 배금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하나 그의 뜻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돈 때문에 치료를 그만두기엔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의 효과가 무척 좋았다. 암의 크기가 크게 줄어들었고 아버지의 기력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중단하고 그 중단의 이유가 재산분배를 위한 것이라면 그 뜻에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다시금 아버지의 삶이 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평생을 홀로 눈비 맞아가며 처자식 손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궂은일을 도맡아 해오고도 아픈 순간마저 남겨질 가족을 생각하는 삶이라니. 아버지가 나르시시즘에 빠져도 좋으니 이제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과거에 짊어졌을 그리고 여전히 짊어지고 있을 가장이라는 무게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여웠다. 나 역시 한 아이의 어미로서 나보다 자식의 삶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 아버지만큼 숭고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기에 많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나는 종종 아버지에게 다른 건 생각 말고 본인만 생각하라는 말을 건넨다. 위로의 뜻으로 건네는 말이지만 그 말은 이미 지쳐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는 것만큼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만 생각하기에 현실은 이해관계가 몹시 복잡하다. 게다가 이미 사회성 교육을 받고 사회적 동물로 살아온 우리는 나만 생각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현실에는 나보다 가치에 우위를 둘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버지에겐 가족이 그런 것 같다. 나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 아버지 삶의 우선순위는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아버지에겐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나와 가족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관성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부디 아버지만 생각하는 삶을 살다가 가시라고. 아버지의 품 안에 날아든 파랑새를 이렇게 보낸다면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아버지를 위한다 여겼던 생각 이건만 결국은 내 안위를 위한 것이라는 게 조금은 부끄럽지만 나는 아버지가 지금부터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아픈 순간에도 가족을 위하고 돌보는 삶은 너무나 가혹하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지는 부채감은 지난 투병 생활을 돌이켜보았을 때 어쩌면 인간으로서 지니는 당연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부채감을 가지기에 아버지는 내게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였다고 말하고 싶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성공의 기준 대한 설문조사에서 1위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존경받는 부모가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국어사전은 존경을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를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존경한다는 말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사랑한다는 말은 관용적으로도 사용되지만 존경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아버지에게 존경한다는 표현을 한 적은 없다. 마음에 담아두고 표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말을 건네기엔 쑥스러우니 현대문명의 힘을 빌려 아버지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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