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예술치료의 기초 수업에서 '창조적 자기이해'라는 주제로 쓴 중간 보고서. 마음에 들어서 올린다.
I. 들어가며
습관을 중시하고 기록을 좋아하기에 진솔성 있게 하는 행동은 많다. 아침에 비타민 챙겨 먹기, 화장하면서 뉴스 듣기, 셀카 찍기, 일기 쓰기 등. 하지만 내가 가장 진솔되게 하며 자아와 가장 연관된 행동은 필연적으로 ‘그림 그리기’ 일수밖에 없다. 나는 항상 그림과 함께 해왔다. 유아 때부터 미술 학원에 다니며 그림을 시작했고 중학교 때 예중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돌입했다. 그림에 진지하게 임한 지 어느덧 10년이다. 그러다 보니 정보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인지하여 내 손끝에서 감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에 익숙해졌다. 내 감정을 건강하게 표출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거늘 이런 능력에 너무 익숙해져 이것이 대단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았다.
이번 수업을 통해 ‘그림 그리기’를 진지하게 돌아본다. 내 그림은 나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림을 통해 나에 대해 무얼 발견하는가? 곱씹고 또 곱씹어 그림이 나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느낀다. 그리고 나의 전부인 그림이 내 자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배우고, 그 과정에서 더 나은 나를 발견한다.
II. 왜 그림이어야만 하는가?
내게 그림은 필연적이다. 왜 그림이어야만 했을까? 그림을 통해 감정을 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13살 때 입학한 미국의 예중은 테크닉 중심이 아니라 창의력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뭐든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을 것을 담아야만 했다. 나는 뭘 그리고 싶은가? 나의 감정은 어떤가? 나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그리는 것이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자연스레 내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나를 알아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고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 생각과 감정을 담고, 종국에는 나 자체를 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을 통해 감정을 마주할 수 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누구인지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으며 심리적인 안정감과 영혼의 충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면 미술이 내 기질에 맞아서 어린 나이부터 진지하게 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어릴 적 내게 음악은 소음이었고, 타인과 같이해야 하는 활동은 고역이었다. 야외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고, 활발히 몸을 움직이기에는 어색하게 삐걱대는 몸이 불편했으며, 문학과 글을 즐기기에는 감성이 2% 부족했다. 몸과 마음이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보니 가시를 내리고 편히 즐길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힘들었다. 반면, 그림은 그저 편했다. 손을 움직이기도 쉽고, 색을 고르는 것도 즐겁고, 또 미미하지만 재능도 있는 터라 ‘그림 잘 그린다’라는 칭찬과 관심을 받는 것도 좋았다. 그림을 그릴 때 온전히 나 혼자서, 조용히, 내 안으로 들어갈 때의 그 몰입은 그저 황홀하다.
다시, 그림이 필연적이라고 한 이유이다. 그림은 나의 안식처이다. 그림 그릴 때는 타인과 교류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또 대인관계에 어색한 나 자신을 숨길 수 있다. 바깥세상이 내 에너지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지도 않는다. 리듬감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내 통나무 같은 몸 역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연필을 쥐고 그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수려하게 선을 그려나갈 뿐이다. 그저 내 안에 있는 안전한 공간에 잠시 들어갈 뿐이다. 고로 그림은 가장 익숙하고, 쉽고, 진솔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III. 그림과 나
그림은 나를 어떻게 드러낼까? 단순하게 보자면 내 손끝에서 탄생한 선과 색채의 모든 면이 바로 나 자신이다. 즉, 내 모든 그림은 나를 표현하는 이미지이며, 나는 내 그림이고 내 그림은 곧 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그림이 나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세부적으로 분석한 뒤, 나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얻으려 한다. 이후, 얻은 이해를 토대로 그림을 통해 발견한 나의 빛과 그림자를 설명할 것이다.
(1) 그림으로 나를 표현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대개 현재의 감정, 되고 싶은 내 모습, 그리고 좋아하는 감성을 염두에 둔다. 현재의 감정을 그림에 담을 때는 먼저 내가 뭘 느끼는지 자각해야 한다. ‘기분이 안 좋아’ 같은 두루뭉술한 감정 상태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왜 기분이 안 좋은 것인가? 우울한가? 짜증이 나는가? 질투가 나는가? 비참한가? 자괴감이 드는가? 등등. 이 중 ‘그렇다’라고 대답한 것이 있다면 내 기분을 인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그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의 레퍼런스가 되어줄 사진을 찾는다. 그리고나서야 그림 그리기에 돌입한다. 사진을 참고하며 내 감정을 그림에서 재현한다. 예를 들어:
진로에 관해서 생각할 때 길을 잃은듯한 기분이 들고 눈물이 펑펑 나올 정도로 걱정이 된다. 그럼 팔로 몸을 감싸고 턱을 손에 괴고 있는 여자를 그린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틀어 저 멀리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살짝 인상 쓴 듯 심각한 표정이고 얼굴은 잿빛이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식물들 역시 힘이 없어 축 처져 있다. 흑백이지만 이파리가 어쩐지 노란 것 같다. 시들어 있는 식물만 간간이 있고 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생기가 없다.
여자와 식물은 모두 나다. 걱정과 불안으로 허덕이고 있으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계속해서 감정 상태에 대해 생각한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기분이 드는 이유에 대해 탐구하려 애를 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권을 쥔 느낌이다. 감정을 원하는 대로 이끌 수는 없지만 엇나가지 않도록 고삐 정도는 쥔 느낌이다.
현재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우울한 경우가 많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머리가 복잡할 때에야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곱씹기 위해, 처리, 그리고 해소를 하기 위해 연필을 잡기 때문이다. 가끔 이유 없이 우울해질 때 그 감정을 손끝으로 보내며 나에게 묻는다. 왜 우울하지? 그렇게 파고들다 보면 우울의 원인에 닿을 때가 많다. 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림으로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우울을 한결 덜어내 훨씬 후련하고, 그것에 만족한다.
이어서 내 그림에는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투사가 된다. 내가 원하는 것들인 편안함, 나른함, 황홀감, 화려함, 결단력, 의지, 강한 눈빛, 자기애가 내 그림에 담겨 있다. 이들은 다른 듯 하지만 사실 서로 얽혀있다. 나는 거의 항상 피곤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완벽한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 침대, 별과 달, 이불을 그린다. 편안함을 그리지만 그렇다고 절대 지루하지 않다. 재미없는 것은 싫어하는 탓에 그림 역시 지루하게 두지 않는다. 별과 달, 꽃, 혹은 다른 장식적인 이미지들은 사용해 배경을 꾸미고 강렬한 색을 사용해 단조로운 느낌을 없앤다. 그래서 내 그림은 화려하다.
화려한 배경 속 편안함을 즐기는 인물은 나른해 보인다. 몸은 긴장 없이 편안하지만, 시선은 청취자를 향해 강하게 꽂혀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당당한 눈빛은 강한 결단력과 의지가 보이는데, 이는 그림이 주는 전체적인 나른함과 상반돼 짜릿한 느낌을 준다. 늘어져 있는 육체의 나른함과 상반된 카리스마 있는 눈빛, 그 대립은 황홀하다. 그런 맹렬한 시선은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자만 보일 수 있는 값진 눈빛이다. 나는 이런 눈빛을 원한다. 내가 그런 눈빛을 했으면 한다. 내가 나에게 당당하고 싶고, 자신감이 넘치고 싶으며, 튼튼한 코어를 가져 결단력과 의지가 강했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내 사랑이 넘쳐흘렀으면 좋겠고 그런 넘치는 자기애가 화려하게 표현됐으면 좋겠다. 내가 지루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림에는 내가 좋아하는 감성(aesthetic)도 담는다. 레퍼런스 이미지 중 마음에 드는 감각적인 감성이 있으면 그걸 나만의 식으로 풀어 그림에 옮기는데, 고정 요소들이 있다: 레이스, 하얀색, 볼륨, 진주, 리본, 화려한 금빛. 이는 내 물적인 취향이 한껏 반영된 것으로 내가 외적으로 좋아하는 것, 혹은 실제로 소유하는 것들을 나타낸다. 반면 조금 더 추상적이게는 다양하고 강한 색채, 강약이 확실한 선, 움직임,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그림을 자유롭고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경직된 것은 재미가 없으니 기피한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부분들을 나열해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내 그림에 넣는 요소들에 무의식적으로 끌리며, 사람을 대할 때도 그림을 대할 때와 똑같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우선 내 그림의 피사체는 90% 사람인데, 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내 성향을 보여준다. 사람만큼 재미있고 또 재미있는 대상은 없다고 본다. 사람만큼 감정을 알기 힘들며, 기분이 시시각각 변하고,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는 없다. 나는 사람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고, 대화 하는 게 좋고, 알아가는 것이 좋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성을 띠고 있는 하나의 우주라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미지의 우주와 조우하는 것과 같고,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한 우주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또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피사체의 겉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내 그림이 실제로 그 사람과 얼마나 똑같냐(verisimilitude)는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사람의 눈이 얼마나 큰지, 코가 얼마나 높은지, 입술은 얼마나 통통한지 하는 세세한 측면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이목구비와 자세, 그리고 제일 중요한 눈빛이 모두 아우러진 전체적인 느낌이다. 피사체가 품고 있는 그만의 아우라와 내가 피사체에서 받는 특유의 에너지가 융합돼 새로운 느낌이 종이 위에 탄생한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은 ‘재미있다’ 일 것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좋아해 타인에게 재미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종종 듣고 스스로도 인정을 한다. 하지만 그림에서만큼은 ‘재미없다’는 금기이다. 색, 선, 피사체의 포즈나 표정, 배경 어느 한 곳이라도 그림을 튀게 해주는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절대 지루하면 안 된다. 나아가 생각해 보니 비단 그림 그릴 때만큼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을 볼 때도 그렇더라. 나는 내가 잔잔하고 진지한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건만 재미있고 통통 튀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은 무의식의 창으로 내 취향과 생각을 한껏 머금어 나를 들어내는 거울이 된다.
(2) 나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위에선 내적인 가치를 그림에 투영하는 것을 설명했다. 이제는 내 외적인 부분들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한다. 최근 나의 인물 그림 안에는 나의 외적인 요소가 하나씩은 담겨있다. 특히 레퍼렌스 이미지가 없이 자유롭게 인물을 그릴 때는 내 외적인 면들이 더더욱 담겨있다. 동그란 얼굴, 각진 턱, 노란빛 도는 하얀 피부, 아치형 눈썹, 올라간 눈꼬리, 동그란 코, 작은 입, 볼 터치, 단발, 갈색 머리. 이 중 하나는 꼭 들어간다.
사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계속 질문을 하지만 이렇다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저 나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내 외적인 부분까지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그림에 넣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플랑드르 르네상스 화가 얀 반 에이크는 모든 인물화를 자기를 닮게 그렸다고 한다. 중학교 때 처음 이걸 들었을 때는 웃긴 동시에 ‘얼마나 자신에 심취하면 저럴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는 반 에이크가 자기애에 심취한 조금 재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8년 뒤 내가 그러고 있다. 인물들에게 올라간 눈꼬리와 갈색 머리를 부여하는 나는 아마 자기애에 심취한 조금 재수 없는 이상한 애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 모든 그림은 나의 자화상이다. 친구가 그랬다. 내가 내 그림과 닮았다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 그들 고유의 색이 진하게 드러나고 어쩐지 다들 본인의 그림과 닮았다. 나도 그런 걸까? 난 내 그림이 좋아서 내가 정말 내 그림 같았으면 좋겠다. 그런 매력적인 얼굴, 자신감에 찬 강한 눈빛, 화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사람이면 좋겠다.
IV. 그림을 통해 발견한 것
나의 가장 그림자는 비교, 우울, 걱정, 화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열등감, 자괴감, 낮은 자존감, 자기혐오이다. 나는 내성을 자주 하는 편이라 나의 그림자는 이미 세세하게 인지하고 있다. 나는 남들과 비교를 많이 한다. 타인의 장점을 너무 크게 해석하고 나의 장점을 평가절하한다. 타인의 장점을 나의 단점에 대입해 내가 부족한 부분만 생각한다. 이로 인해 열등감이 생기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 자존감이 낮아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 또한 화가 많다. 정확히는 나 스스로 화가 많다.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많지만 나에게 너무 박하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수백 가지이며 내 몸과 성격을 갈아엎고 싶을 때도 많다. 자기비하가 심하고 자존감이 낮으며 남들의 의견에 잘 휩쓸리는 갈대이자 남의 싫은 소리에 눈물을 보이는 5살짜리 겁쟁이다. 그냥 남들은 너무 잘났고 나는 너무 못났다.
현재의 감정을 그림에 담는 그 순간에 이런 그림자를 여과 없이 느끼는 것 같다. 못난 자신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면서 우는 때도 많다. 모든 것이 힘들 때 불안은 극치에 닫고 그림은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진다. 위에서 현재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우울할 때가 많다고 얘기했다. 심리적인 어려움은 그림의 가장 좋은 장작이다. 우울과 걱정과 자기혐오 같은 그림자를 먹고 창조적인 영감은 활활 타오른다.
그림자를 인지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너무도 다른 일이다. 하지만 여태껏 인지는 했지만 수용은 못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그림자를 그림의 재료로 쓰고 있는 시점부터 이미 수용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당당히 내 그림자를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미 수용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수용이라는 개념을 너무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난 내가 느끼는 감정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받아드린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해도 한다. 그럼 이걸로 감정 수용은 이미 마친 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감정을 수용했음에도 나 자신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가끔 내가 미치도록 싫다가도 어떨 때는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내가 사랑스럽다. 사람 기분이 어찌 일정할 수 있겠냐마는 어떨 때는 도가 지나친 것 같다. 나도 내가 헷갈린다.
이런 양면성과 관련해서 찾은 해답은 바로 나의 빛에 있었다. 빛은 그림자보다 찾기 어려워서 빛을 찾기 위해 처음으로 ‘나의 빛’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진실성 있는 활동을 고를 때 이미 나는 나를 위해 하는 행동이 많음을 깨달았다. 그림에 관해 쓰면서도 나는 자기 이해가 뛰어나며 내가 그림에 정확하게 무얼 표현하고 싶은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더라. 나는 내가 뭘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고 있고, 나에 대해 관심이 있으며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굉장히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관심을 줄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고서야 창조하는 모든 그림에 어떻게 내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가족과 친구에게도 이 정도의 애정은 주지 못한다.
다만 애정이 커서 기대 역시 큰 모양이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치는 내가 싫은가보다. 내가 90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실제 내 역량은 60이라 그 간극이 혐오와 실망을 만든다. 내가 세운 기준의 벽이 너무 높아서 그 벽이 나를 압박하는 그림자를 만든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빛을 발견하니 위안이 된다. 그림자는 혐오에서 비롯되는 것인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닌 애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구나. 오히려 그 반대인 사랑하는 것이었구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빛이 나더라. 다들 나보고 그랬다. 나도 빛이 난다고. 스스로는 그걸 느끼지 못했지만, 감사히도 이번 경험을 통해 조금은 느낀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성장해간다. 혐오와 애정의 줄다리기 과정 속 나는 나에 대해 한층 더 깊은 이해가 생기고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내 그림에서 드러난다. 그림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20살 때보다 선에 자신감이 생겨서 마음 가는 대로 휙휙 그을 수 있다. 강약 조절 테크닉을 이제 익숙하게 다룰 수 있다. 사진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레퍼렌스로 삼아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성을 녹인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깨달은 건데, 인물의 눈빛이 더 강해졌다. 그림 속 인물도 카리스마가 생기고, 그걸 그리는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2,3년 전만 해도 밍숭맹숭 임팩트가 없던 그림이 눈빛과 분위기라는 고유 정체성을 찾아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그림체’가 탄생했다.
V. 맺으며
그림을 통해 한층 더 깊이 있는 자기 이해를 얻었다. 나와 내 그림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돌이켜봤고, 내가 그림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짚어보아 나의 모든 그림의 내가 있으며 내 그림은 나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 자기애가 충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바라고 있던 내 모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두운 방에서 거울을 보고 검은색 옷이 아닌 하얀색 옷을 원한다고 그토록 외쳤는데, 불을 켜보니 내 옷은 이미 하얀색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내가 할 것은 수용하고 만족하기다. 그림자를 수용하는 것만이 아닌 새로이 찾은 내 빛을 수용하기. 내 발전을 수용해야 한다. 내 기준에서 90이 되지 못한다고 나를 평가절하 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60을 봐줘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90은 되지 못해도 80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90이 되지 못하는 거 자기혐오와 눈물에 얼룩져 80이 되느냐, 평온과 미소에 쌓여 80이 되느냐의 차이이니. 만족하는 내가 되고 발전을 수용하는 내가 되자.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새로운 감각을 깨우고 싶다. 나는 내 몸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림 속 몸은 자유롭고 내 그림은 움직임이 만연하지만 현실의 내 몸은 딱딱하기 그지없다. 운동을 계속해서 근육을 느끼는 것은 익숙하지만 단순히 다리 근육이 당기는 그런 감각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것을 원한다. 리듬을 타고 싶고 춤을 추고 싶다. 흔히 리듬에 몸을 맡긴다고들 하지 않는가. 못하겠더라. 몸이 너무 뻣뻣해서, 너무 직선이어서 곡선인 음악과는 융화가 되지 않는다. 리듬을 탈 줄 아는 이의 몸은 바람에 날리는 천처럼 자유롭고 부드럽다. 내 몸은 길거리에 있는 현수막 배너이다. 바람에 밀리고 부러질지언정 바람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발레를 했지만 사실 초보 발레는 정해진 순서에 맞춰서 제한된 동작만 해 크게 리듬감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격이 잡혀 있고 어떻게 보면 딱딱한 체계여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언젠가는 몸을 완전히 받아들여 리듬을 탈 줄 아는 그런 자유로운 몸이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내 그림자를 수용하고 빛을 발견하며 새로운 감각들을 익혀 더 완전한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