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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목나무와 매미 Feb 26. 2024

아름다운 풍경과 그렇지 못한 주인공

<설국>(민음사, 2023)을 읽고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7쪽)


 소설 <설국>(민음사, 2023)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사람도 이 유명한 첫 문장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문장으로 <설국>은 '겨울'하면 떠오르는 소설이 되었고, 눈 구경을 위해 하코다테와 아오모리를 방문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이 되었다.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압축해서 표현한 첫 문장에 이어 <설국>은 아름다운 전경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시마무라가 온천 마을에 도착할 때 보았던 차창에 비친 요코의 모습, 지지미 옷감을 짜던 마을의 묘사는 색감을 잘 살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중략)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137쪽


 이러한 서술은 온천 마을과 도쿄로 대표되는 현실을 분리한다. 시마무라가 온천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독자들 역시 꿈속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지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온천 마을의 사람들 역시 소박한 마을의 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온천 마을의 대표적인 인물인 고마코는 모든 일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시마무라에게도 자신의 온 마음을 준다. 유키오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게이샤 일을 시작하고, 화재 속에서 요코를 구해내는 모습에서 그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시마무라의 말과 행동은 정답고 깨끗한 온천 마을과 대비된다. 자조적이고 타인의 일에 무관심하다. 서양 무용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그에 대해 평가하고 심지어 그런 스스로를 냉소한다. 본인은 책임감도 없으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조소한다. 고마코, 요코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55쪽) 도쿄에서 요코를 부양하지도 않을 거면서 도쿄로 데리고 가냐며 묻는다. 화재가 난 순간마저도 요코를 데리고 나오는 고마코에게서 멀어진다.

 시마무라의 이런 태도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마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조되어 더 지질해 보인다. 도쿄의 본처, 온천 마을의 고마코, 동시에 요코까지 관계를 맺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그 어느 사람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관망하기만 하고 회피한다. 시마무라는 섬세하고 깨끗한 설국에 남은 한 점의 얼룩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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