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를 읽고
2021년 3월 24일 5시 30분 2호선 잠실역에 들어섰다. 퇴근길이긴 했지만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지하철이 오기 기다리기를 10여 분,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서 줄을 설 수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도 지하철은 한 정거장 전에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늦어지는 열차에 짜증이 밀려올 무렵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2, 3호선 운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조속한 시간 안에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다시 개찰구 밖으로 빠져나갔고 나 역시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서 귀가했다.
그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와 이동권 보장을 내걸고 지하철에서 시위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누리꾼들은 “출퇴근 시간에 시위해서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이 피해봤다”, “떼도 적당히 써야지 시민들의 일상을 완전히 망치는 일이다”, “이럴수록 장애인에 대해 반감만 생긴다.”면서 장애인 단체에 비판을 쏟아냈다.
이러한 누리꾼들의 반응을 보며 얼마 전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다양한 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보여 온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주위에서 만연하게 발생하는 차별을 이야기한다. 일반 사람들은 스스로를 '차별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고 각각의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이 차별을 한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 보아야 한다.
p.38
차별을 받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속해 있는 층위에서만 사회 현상을 바라볼 때 차별이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개인의 정의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차별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시각들이 모여 ‘선량(하다고 여기는) 차별주의자’들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차별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 사이에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장애인들의 일이 남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시위를 지지하는 이 댓글에서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생각났다. ‘무지의 베일’이란, 한 공동체 안에서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등의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을 전혀 모른 채 사회의 규범을 정할 때 모두에게 정의로운 규칙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때 퀴어 축제를 무조건 반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외국인 근로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근로기준법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고용허가제 유지를 주장할 수 있을까? 내가 장애인일 수도 있는데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단순히 ‘시민들의 일상을 해치는 민폐’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양쪽의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모두 아직 무지의 베일 안에 있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전체 장애인 인구 가운데 88.1%가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언제, 누가,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질지 예단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성적 지향, 출신 국가 등(p.43) 다양한 범주에서 차별을 생각해야 한다. 또 차별의 대상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내가 언제든 그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개인의 정의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무지의 베일’ 속에서 개인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