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의자 Van Gogh's chair
뒷 배경의 파란색은 고흐의 차가운 마음을 나타낸다. 저렴해 보이는 이 초라한 의자 위에는 담배 파이프를 놓았다. 고흐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담배파이프가 고흐의 유일한 친구 같다. 외롭다는 표현을 담배파이프로 대신했다.
이 의자는 연작이다.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에 가면 이 당시 반 고흐가 그린 또 다른 '고갱의 의자'가 있다.
내셔널 갤러리 ’ 고흐의 의자‘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연작인 ’ 고갱의 의자‘를 빼놓을 수 없다.
'고흐의 의자'와는 대조적으로 고급스럽다. 바닥도 비싸 보이는 카펫을 그려 넣었다. 고갱의 따뜻함을 나타내는 촛불이 벽을 환하게 비치고 있다. 의자 위에는 지식과 계몽의 상징인 촛불과 책이 올려져 있다. 팔걸이까지 갖춘 고급스러운 의자는 고갱이 고흐에게 얼마나 높은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의자 위의 책을 성경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고갱이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함께하기를 바라는) 고흐의 맘을 표현했다고 이야기한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고흐의 의자'를 이해하려면 둘 사이를 좀 더 깊게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 모두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화가의 직업이 아닌 다른 일을 하다 뒤늦게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갱과 고흐는 1888년 10월 23일부터 두 달간 노란 집에서 동거했다. 고흐와 고갱이 공동생활을 하기로 하였지만 둘은 많은 면에서 달랐다. 주식 중개인으로 지적인 면도 갖추었던 고갱은 오만함으로 이미 악명이 높았고 고흐는 불안정한 정신과 행동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공통점은 모두 특이한 개성과 불굴의 의지를 소유하였던 점이고 둘 사이 가장 큰 문제는 서로를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잘 아는 사람끼리의 동거도 문제가 생기는데 둘은 오죽했을까?
둘 동거에 앞서 1888년 5월에 고흐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고갱에게,
얼마 전 아를에서 방 네게 짜리 집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고... 함께 작업할 마음이 있다면.. 수도승처럼 살아갈 화가를 (내가) 찾게 된다면... 아주 기쁠 겁니다. 내 동생 테오가 한 달에 250 프랑씩 보내 주는 돈을 우리가 나눠 사용하면 되고 당신은 내 동생에게 한 달에 한 점 그림을 보내면 됩니다...'
이 편지를 받고 고갱과 고흐의 동거가 시작된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는 아를의 동거 생활에 대해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갱은 몇 달 동안 숙박 문제와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미술품 거래 상인인 고흐 동생, 테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정착에 필요한 돈만 마련되면 다른 열대 지방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공동생활은 지속적이며 고갱이 영원히 아를의 화가 공동체 생활이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다. 고흐는 아를에서 둘이 형제처럼 생활하면서 작업하고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 생각을 했고 이를 더 발전시켜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관련된 예술적 전수까지도 꿈꿨다. 여기서 고갱이 주도적 역할을 하리라고 고흐는 믿었다. 고흐는 고갱에게 심적으로 의지했다.
둘의 동거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아를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을 고흐 동생, 테오는 연달아 판매했다. 고갱은 큰 성공을 거 둔 반면 고흐의 작품은 거의 팔지 못했다. 오만했던 고갱은 더 우쭐해졌고 열대지방으로 가려던 계획에 불을 붙이게 된다. 반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돈을 받는 것조차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고흐는 5살이나 더 많은 고갱의 오만함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아를 공동체에서 유능한 스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믿었다.
둘은 우정을 보여주기 위해 서로를 그려주기도 했지만 고흐를 나약하게 그린 고갱에게 불만도 쌓이게 된다.
서로 너무나 다른 둘은 자주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고흐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은 고갱이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1888년 12월 23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원래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고흐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고 아를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를 본 고갱은 짐도 챙기지 못 한채 바로 파리로 돌아간다.
후기 인상주의 대표 화가였던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빠른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고갱은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다는 현실적 문제도 한몫했겠지만 귀를 자른 고흐도 보살피지 않고 바로 파리로 떠난다. 그 뒤에 고흐와 테오 형제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고흐의 삶이 알려질수록 고흐에 대한 평가도 올라가고 동정이 생겼다.
고갱은 자연을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통해 재결합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장식적 요소를 더하여 상업적인 효과까지 노렸다. 이에 반해 고흐는 이 재결합 과정을 과장으로 보았고 있는 그대로 자연의 색과 터치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자기 앞을 막는 사람과 격하게 싸우기로 유명한 고갱과 이 과정에서 고흐는 많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고흐는 늘 고갱을 존경해 왔다. 고흐가 그린 두 의자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다. 외로움과 동시에 고갱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고갱이 어려웠던 시절 동생 테오에게 부탁해 그의 빚을 갚아주었고 고갱이 아를에 온다고 했을 때는 고갱의 방을 손수 비싼 해바라기로 장식까지 해놓았을 정도로 고갱을 많이 존경했다.
고흐의 불안한 정신에서 나온 광기만 없었어도 둘은 적어도 일 년간 아를에서 다투면서도 작품활동을 잘하며 보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동거하는 기간 동안 둘은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했고 분명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라고 고갱은 훗날 둘의 동거 기간을 평가했다.
고흐는 고갱의 상업적인 상징주의 예술관 수용 하지 않았지만 고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을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고 고갱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고흐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에는 분명하다.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부터 고갱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고갱 침실을 꾸밀 걸작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과 '시인의 정원'과 같은 명작을 그렸다. 또 고갱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좋은 작품들을 열심히 많이 그렸다
후기 인상파시대의 대표 화가인 두 명은 19세기 후반 사진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미술계를 구했던 대단한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그림을 보기 전에 그 상황을 알면 반고흐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