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as Who?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술방에서 마취 담당으로 일하는 날이었고, 그날은 내가 PACU / Airway (호흡관) 호출기를 담당하는 날이었다. (PACU : 수술 후 회복실)
PACU / airway 호출기를 담당한다는 것은, 수술 후 회복실 (PACU) 환자들 관리와, 병원 전체 병동 환자들 대상으로 심폐소생술이나 호흡관이 필요한 환자들이 생길 경우, 호출을 받고 달려가는 마취과 의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국의 병원에서는 병동에 내과 레지던트들이 워낙 많아서인지 병동에서 호흡관이 필요한 환자가 발생할 경우 보통 내과에서 병동환자들에 대한 호흡관을 넣는 것을 도맡아서 담당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마취과에서 병동 및 중환자실 환자들의 호흡관을 책임지고 담당한다. PACU / airway 호출 담당은 보통 마취과 레지던트 1명과 마취과 교수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PACU/Airway 호출기를 담당하면, 병원 전체를 누비면서 뛰어다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통 수술방은 비교적 쉬운 수술방 한 개만 담당한다.
보통 병원내 안내 방송으로 심폐소생술 (CPR) 이 뜰 경우,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가 발생한 병원 내 위치와 층수가 방송된다. 그렇게 방송이 됨과 동시에 호출기가 부리나케 울리고, 보통은 빠르게 뛰어가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1개뿐인 수술방 환자의 마취관리가 잘 되어가고 있던 와중에, 병원 내 안내 방송으로 본병원 바로 옆에 있는 옆 건물 5층에서 심폐소생술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듣고는 재빠르게 뛰어갔다.
일단 도착해서 보니 진짜 심폐 소생술이 진행 중이었고, 내가 워낙 빨리 뛰어와서인지 마취과 레지던트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마취과 레지던트에게서 문자가 왔다.
"진짜 심폐소생술이라는데요…"
'업데이트는 고맙지만, 현장에 먼저 도착한 나는 이미 알고 있는데...'
나도 이미 꼰대에 해당 혹은 진입하는 나이라 그런지, 당연히 레지던트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와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병원에 와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환자 및 보호자들이 좀 있어서 그런지 보통 심폐소생술 방송이 떠도, 진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보통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금방 회복하거나,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일단 안내 방송으로 ‘심폐소생술’이라고 방송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환자는 심폐소생술이 진행 중이었고, 아직 자발적으로 심장 기능이 회복되지는 못했다.
마취과 레지던트와 함께 환자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환자의 머리맡으로 들어가서 호흡관을 넣을 준비를 하였다.
"마취약을 주고 호흡관을 넣어야 하나요?"
같이 호출기를 담당하는 마취과 레지던트가 이제 막 1년 차가 되어서 인지, 경험이 많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한다.
지금 환자는 이미 반쯤 죽음에 발을 들여놓고 있으므로 마취약을 줘서 더 혈압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므로, 마취약을 따로 주지는 않는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심폐소생술이 진행 중일 때 환자 입속에 비디오 후두경을 넣은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심폐소생술이 잠시 멈춰서 맥박을 확인할 때 재빨리 호흡관을 넣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 잠시동안의 시간에 짬을 내서 호흡관을 넣고, 환자 머리맡에서 다시 재개된 심폐소생술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해당 환자에 대해서 심폐소생술을 진행하던 심장내과 펠로우와 레지던트들이 계속해서 루카스를 찾고 있었다.
“루카스는 어디 있어?”
“루카스는 오고 있는 거야?”
'루카스는 대체 누구이길래… 다들 이렇게 애타게 찾을까?'
잠시 궁금해졌지만, 심폐소생술이 계속 진행 중이라 상황을 지켜봐야 했으므로 금방 잊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심폐소생 중에 환자의 호흡관으로 분홍색의 거품 섞인 분비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환자의 호흡관을 통해 기관지 내시경을 해보기로 했다.
빠르게 진행해 본 기관지 내시경 검사상 크게 문제가 없어서, 계속되는 심폐소생술을 환자 머리맡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 와중에 심장 내과 의료진들이 루카스에 대한 질문을 아직도 서로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루카스는 아직인가요??”
“루카스 오면 이쪽으로 빨리…”
'아니… 루카스는 대체 언놈인데, 환자가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고 하는데… 기어 오고 있나?'
그때, 키가 매우 크고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 한분이 인파를 헤치고 환자 침상 곁으로 오고 있었다.
병원 및 의학에서 워낙 분야가 전문화되고 있다고는 하나, 이제는 심폐소생술 전문 의료인을 따로 고용할 정도로 고도로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나 보다.
' 심폐 소생술 전문인답게 엄청 기골이 장대하시군요 '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가 들고 있던 커다란 반월 모양의 기기에 시선이 빼앗기면서 잦아들었다.
“루카스, 빨리빨리 고정해 주세요”
그러다가 반월모양의 기기 중앙에 쓰여있는 글자를 보면서, 지금까지의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루카스는 기골이 장대한 심폐소생 전문인의 이름이 아니라, 자동 심폐소생술 시행기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의학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동 심폐소생술 기기를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폐소생술을 잠시 멈추고, 루카스의 흡착판을 환자 가슴 위에 위치시키고 환자손을 루카스의 반월판 밖으로 고정시켜 놓은 다음, 루카스 작동을 시작했다.
심폐소생술이 자동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영상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mfgqzJIcagk )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부작용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보통 양질의 심폐소생술은 흉강이 5cm 이상의 깊이로 압박을 해야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면서도 6cm 이하의 깊이를 유지해야 갈비뼈 골절등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지침에 나와있다. 단순히 흡착판으로 누르기만 하고 압박하는 힘이나 깊이까지 조절하는 초정밀 피드맥이 없는 듯 한 루카스 같은 기계를 사용하면 잘못하면 ‘갈비뼈 브레이커’가 되기 십상일 텐데…
(필자 注: 보통 부모님의 고혈을 짜내는 사람을 ‘등골 브레이커’라고 표현하는데, 루카스 같은 경우, 문자 그대로 갈비뼈 브레이커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도 루카스가 작동되기 시작하자 서로 돌아가면서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던 의료진이 그래도 한숨 돌리는 듯해서, 루카스라는 기계의 순기능이 바로 증명되는 것 같았다.
(보통 2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행하고 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주어야 특정 사람에게만 피로도가 몰아서 쌓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의료진의 수고 덕분인지, 루카스의 수고 (?) 덕분인지, 환자는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자발 순환 회복’(ROSC) 상태로 돌아왔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심장내과 의료진들은 환자의 상태에 안심할 수 없었는지, 환자의 가슴에 루카스를 설치해 놓은 그대로 심장 중환자실로 환자를 이송시켰다.
이송되는 환자를 보면서 환자를 살리는데 일말의 공헌이라도 한 거 같아서 조금 뿌듯한 생각이 들었지만, 루카스에 대한 호기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온갖 신식 기기와 신문물을 접하기 쉬운 마취과가 내 전공과목임에도, 자동 심폐소생술 기기는 처음 접해보는 지라, 계속되는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에는 루카스라는 신문물을 배워 간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루카스라는 기기가 의료 환경에서 좀 더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기기임을 미국 의학 드라마 'The Pitt'을 보면서 깨달았다.
The Pitt는 미국 방송국 Max에서 방영된 최근의 의학 드라마인데, 예전 시카고를 배경으로 했던 미국 의학 드라마에 의대생으로 나왔던 Noah Wyle 이 응급실 전문의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던 의학 드라마이다.
사실적인 의학적 고증이나 개연성 따위는 개나 줘버린 "중증 외상 센터" 와는 차원이 다른 극사실 주의 의학 드라마이다.
The Pitt 첫 번째 에피소드에 바로 이 루카스 기기가 상용되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The Pitt에서도 나오는 의료 기기를 내가 최근에야 접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지고 좀 더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환자 바이탈의 최전선에 있는 마취과 + 중환자 의학과 전문의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Lucas' 를 접해 보았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한다.
이름이 루카스인 줄만 알았던 기골이 장대한 분은 심장내과 소속 간호사였는데,
나의 그런 오해가 생겼던 일 이후에 Electrophysiology lab (부정맥 시술방)에서 Atrial fibrillation ablation (심방세동 부위 절제) 환자의 마취를 맡게 될 때 같이 일하게 된 적이 있었다.
같이 일할 때에 내가 그때 당신 이름이 '루카스'인 줄 알았다고 말해주자, 엄청 크게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기 이름은 Victor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면서 친근감의 표시인 'Fist Bump'를 했던 적이 있다.
원래 이 글을 쓰기 전에, 루카스라는 상품명을 그대로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을 조금 했다.
한국에서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상품명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꺼리는듯한 분위기가 있는 듯한데, 아마 뒷 광고에 대한 부담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절대 구매할 수 없을 이러한 특수 의료기기에 대해서까지 뒷광고를 염려할 정도로 내가 대단한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대답이 바로 나오기에…
그냥 거리낌 없이 그냥 제품명을 실명으로 그냥 썼다.
(또한, 글을 읽는 사람들의 재미를 올려주기에도 실명을 쓰는 게 훨씬 쉬웠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이런 자동 심폐소생 기기 보급이 일반화가 된다면...
(예를 들어서 ‘여보~ 아버님 댁에 루카스 한대 놔드려야겠어요…’라는 대화가 일상적인 시대가 열린다면)
뒷광고에 대한 염려 또한 많아질 것이므로 그때가 되고 나서 이 글을 브런치에서 내려도 늦지 않을 듯하다.
(필자 注: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 는 8-90년대 엄청 히트 쳤던 모 보일러 회사의 선전 카피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