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의실 문... 어디까지 열어봤니?
"열려라 참깨!"는 천일야화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에 나오는 주문이다.
도둑들이 보물을 숨겨둔 동굴 문 앞에서 이 주문을 외우면 문이 열린다.
잠긴 문을 여는 주문의 대표적인 예로 쓰이며 많은 창작물에서 오마주 되어 나타난다.
(출처 : 위키백과)
갑자기 예기치 않게 우리 메인 병원 5층의 내시경실 마취를 담당하게 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잠깐 커피라도 마시려고 5층에서 7층으로 올라가는 간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우리 병원의 5-7층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5층 : 내시경실 , CT, MRI, 중재적 방사선실, 심도자실, 기관지 내시경실
6층 : 수술방
7층 : 남녀 탈의실, 휴게실 및 업무공간
6층 수술방 층에서 수술실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건넸다.
"오늘 일이 잘 안 풀리시나 보네요"
'헉... 어떻게 알았자? 내 머리 위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걸 (Fuming) 들켰나?'
아마도 내 표정이 안 좋은 게 밖으로 다 드러났나 보다.
원래는 수술방 마취 담당인 날이었는데, 그날 아침에 갑자기 내시경실 마취로 바뀌게 되었는 데다가...
그렇지 않아도 거의 잡일에 불과한 일만 하게 되는 내시경실 마취를 담당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현자타임이 올 때가 많아서 그랬는지...
좋지 않은 내 마음이 표정에 훤하게 쓰여 있었나 보다.
7층에 도착해서 탈의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 간호사는 본인의 사원증을 깜빡했다면서 내 사원증으로 탈의실을 열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열어주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간호사가 여자라서 여자 탈의실 문을 남자인 나의 사원증으로 열어줘야만 하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아무래도 (남자인) 제 사원증으로는 안 열릴 것 같은데요... 뭐... 그래도 함 해보죠..."
내 사원증을 여자 탈의실의 보안 인식 센서에 대자마자 '삑' 소리가 나면서...
황당하게도 여자 탈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웃으면서 여자 탈의실로 들어가는 간호사가 사라지자,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17년 전으로 즉시 떠나는 시간여행 장치 속으로 순간적으로 빨려 들어갔다.
17년 전 나는 미국에서 일을 막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외과 인턴이었다.
당시에 나는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메이요 클리닉(본점)에서 일하던 새내기 외과 인턴이었다.
Mayo Clinic (메이요 클리닉)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Mayo Clinic (메이요 클리닉) 은 미국의 최고+최대 병원 중 하나이고, 내가 근무하고 있던 시절에는 미국 병원 전체 순위에서 존스 홉킨스에 살짝 밀려서 항상 2등밖에 못하는(?) 그런 병원이었다. 의학적인 자원, 시설 및 물자가 엄청 풍부했던 곳으로, 의학을 공부하거나 수련받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보이던 '의료계의 디즈니 월드'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이름만 번드르르한 하바드 혹은 존스 홉킨스 같은 곳과는 겸상도 같이 안 할 정도의 차이로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올라서서 자리매김한 지 꽤 되는 Mayo Clinic (메이요 클리닉)이다.
나는 미국에서 일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외과 인턴이었고, 성형외과 로테이션을 돌던 외과 인턴이었다.
병동에 있던 나에게, 성형외과 펠로우가 직접 전화를 해 탈의실 앞으로 오라고 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지... '
메이요 클리닉에서는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존재하지 않았고, 성형외과 수련의들은 모두 펠로우 (전임의)만 존재했다. 그 성형외과 펠로우는 Oregon (오레건) 주(州)의 포틀랜드 시(市)에서 일반 외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Mayo Clinic (메이요 클리닉)으로 옮겨와서 성형외과 펠로우 2년 차를 하고 있던 여자 펠로우였다.
환경 친화적인 Portland, Oregon에서 살다 와서, 1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버리던 Minnesota (미네소타) 주는 정말 적응이 안 된다면서 맨날 궁시렁대던 펠로우였다.
(그러면서도 밥은 잘만 쳐묵 쳐묵... 띄룩 띄룩...)
그 성형외과 펠로우와 나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미국 병원에서 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적응이 덜 되어 있던 나랑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 또한 맨날 자기 마음대로 일처리를 하던 그 성형외과 펠로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아래의 에피소드 또한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탈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성형외과 펠로우에게 "무슨 일로 이곳으로 저를 부르셨나요?"라고 묻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펠로우가 하얀 가운 위로 패용한 나의 사원증을 잡아채더니, 바로 탈의실 인식 센서에 갖다 대었다.
"아니... 잠깐만... 안돼! 어차피 그거 안 열려... X바!" 라고 부르짖었던 내 말이 무색하게 탈의실 문이 바로 열렸다.
커다란 문제가 있다면... 그 펠로우가 내 병원 사원증을 잡아채서 열었던 탈의실이 여자 탈의실 출입문이었다.
'아니... 이게 왜 열리지?' 황당해하면서 넋이 완전히 나가있는 나를 뒤로 하고 그 성형외과 펠로우는 쌩하고 바로 여자 탈의실내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내 사원증으로는 분명 여자 탈의실의 문이 열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국에 처음에 와서 근무했던 메이요 클리닉은 정말로 대단한 곳이었다.
모든 것이 전자동화되어서 움직이는 듯했고, 건물도 정말 많고 너무너무 넓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첫 수련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메이요 클리닉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는 강박증 같은 노이로제에 걸리기 일보 직전 상황까지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동화가 잘 되어 있는 메이요 클리닉에서는 내 행동 일거수일투족이 모조리 다 감시받는 듯하다는 느낌을 매 순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과 인턴으로서 약처방이나 오더를 입력하면...
진짜 10초가 멀다 하고 바로 병원 근무 약사에게서 호출이 왔고...
병동이나 응급실에서 외과 인턴을 찾는 호출이 왔을 때, 빠르게 응답이 없었다면서 내 윗년차 레지던트에게 바로 피드백이 들어가기도 했고...
가끔씩 우선 호출 (Priority Paging)로 교수님이나 환자가 직접 나를 호출해서 내가 응답하기까지 수화기 너머에서 실시간으로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 이럴 경우 호출기 소리가 울리던 소리부터가 달랐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1초 1초가 흐를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내 행동 모든 것이 감시당한다고 느끼고 있던 와중에, 내 사원증으로 여자 탈의실 출입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분명 병원 어딘가에는 보고가 되었을 것만 같았고...
내 커리어가 시작하자마자 끝나나 하는 턱밑까지 차오르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서...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남자인 내 사원증으로 왜 여자 탈의실 출입문이 열렸나 하는 점은 당시에는 문제점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나는 성형외과 펠로우의 위력 앞에 어쩔 수 없이 사원증을 빼앗기다 시피해서 어쩔 수 없이 여자 탈의실 문을 열었다 하는 문장을 영작을 해 놓고 좀 더 매끄럽게 계속 다듬었다. 나중에 잡혀가면 변명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나에게 살길이 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일을 긴장감에 살던 나에게 어디서도 징계 위원회나 어디로 출석을 하라는 통보는 하루이틀 지나고 몇 주 몇 달이 지나도 없었고, 나는 한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이번 간호사의 갑작스러운 여자 탈의실 개문(開門) 요청으로 인하여, 나의 외과 인턴 시절의 '여자 탈의실 개문(開門) 에피소드'가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쌩난리가 났을 텐데...
그나마 미국에서 일어나서 다행이었나?
하지만 이제는 미국 병원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고, 산전, 수전 & 공중전까지 모두 다 겪은 요즘의 나는...
내 사원증 아이디로 여자 탈의실 문을 연 것에 대해서 나중에 혹시나 라도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그거 너네가 그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왜 내 탓을 하냐?"
"혹시 자를 거면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부당하게 징계되었을 때, 소송 걸면 내가 무조건 이기는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금 받고 훨씬 빨리 은퇴할 수 있게...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
"조기 은퇴 Go Go!"
지금의 나라면 위와 같은 대사를 준비하면서 차분히 기다렸을 것 같다.
그나저나 예전의 그 성형외과 펠로우도 그렇고, 수술실 간호사도 그렇고...
다들 다른 성별의 사원증으로 탈의실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근무하고 있던 병원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님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걸까?
진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