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송곳이 되다
프롤로그: 송곳이 되다
지난밤 꿈에서 나의 몸은 송곳이 되어 있었어. 이런 꿈에서 보통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는 해. 혹자는 이것을 자각몽(Lucid Dream)으로 정의하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꿈속에 있다고 자각을 하면 꿈속에서 만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등장인물과 원하는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다던가 뭐 그런 거야. 그런데 난 자각몽을 꿔도 내가 뭘 딱히 할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나는 보통 제삼자가 되어 나 자신을 관찰하거나 내 주변을 관찰하는 게 고작이야.
그런데 왜 하필 송곳이었을까? 망치, 드라이버, 스패너도 있고 렌치도 있는데 왜 하고많은 공구 중에서 송곳이 된 걸까? 잠깐? 송곳이 공구가 맞나? 보통 공구는 철물점에 파는데, 송곳은 문방구에 팔잖아. 그렇다고 송곳을 문구류로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것 같기도 하지? 뭐 그건 그렇고 가장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은 나는 내가 송곳이 된다면 손잡이 부분이 다리가 되고, 뾰족한 쪽이 머리가 될 것 같았거든? 뭐? 넌 아니라고?
여하튼 나는 그랬어. 그런데 신기하게 내 다리가 날카로운 끝 부분이 되었는데 뭔가 서 있기가 너무 애매한 거야.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은 다 이런 느낌일까? 혹시 움직여질까 싶어서 발가락을 움직이는 감각으로 발 끝에 힘을 줘서 최대한 꼼지락거려봤어.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긴 하는데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더라 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보니 아무리 손을 움직여서 얼굴을 더듬어 보려고 해 봐도 전혀 가능하지가 않았어. 무엇보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는데, 발 끝이 뾰족하다 보니까 뭔가 바닥이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는 거야. 몸을 조금씩 기우뚱거리며 움직이려다가 나는 그만 넘어져 버리고 말았어. 다시 일어나려고 해 봤는데 몸이 데굴데굴 구르기만 하고 전혀 일으켜 세워지지가 않는 거야.
‘어차피 꿈인데 그냥 이대로 누워있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띠리리리 띠리리리 알람 소리가 들렸고 난 잠에서 깼어. 얼른 이불을 걷고 발 쪽을 보는데 내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더라고. 꿈이 너무 생생했어. “왜 송곳이었을까…?” 나는 중얼거리며 욕실로 향했어. 딸깍!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이 후다닥 하고 구석으로 달아나고 빛이 싱그러운 얼굴로 내려앉은 욕실에서 난 치약을 칫솔 머리 가장 윗부분에 아주 조금 묻히고 이를 닦기 시작했어
치카치카치카치카 치카치카치카치카 치카치카치카치카 이 닦는 소리가 욕실 벽에 달라붙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동안 난 어젯밤 꿈을 다시 한번 떠올려 “송곳이 딱딱한 바닥에 서려고 하다니 웃기네?ㅋㅋ”
“그런데 나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서 본 적이 있었나? “
작품설명:
인디언 썸머는 작가 본인의 자전적 소설로서, 어린 시절의 실제 경험과 발칙한 상상력이 만나는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 앞으로 등장하는 모든 지명, 인물, 단체 등은 실제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라는 웹툰에서 주인공 이수인은 마치 송곳 같은 인물로 호주머니에 넣으면 어느새 삐져나와 버리는 부조리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송곳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얻은 모티프를 통해 유소년기 그리고 청소년기를 지나는 작가 본인의 과거를 재조명하면서 이 소설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