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집을 잃는다는 것', 2부 '주머니 속의 돌, 심장 속의 돌'
본격적인 팀 UNIVERSE의 활동 이전, <망명과 자긍심(일라이 클레어 저)>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책 <망명과 자긍심>은 퀴어와 비퀴어, 장애와 비장애 등 이분법적으로 파편화된 정체성을 넘어, '교차하는 정체성'을 논해보고자 하는 팀 UNIVERSE의 활동에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세미나 도서로 선정됐다. 1부 '집을 잃는다는 것', 2부 '주머니 속의 돌, 심장 속의 돌' 챕터를 중심으로 책 세미나를 진행했다. 세미나 속기록을 정리해서 공유하되, 참여자의 이름은 초성의 알파벳으로 기록했다.
[1부 장소 - 집을 잃는다는 것]
YG: '집을 잃는다는 것'에서는 113쪽의 내용이 인상 깊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배제, 나의 망명은 퀴어 정체성, 가난한 노동계급 정체성, 시골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부각되는 문제들과 맞물려 있다. 이 문제들은 사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장기간의 체계적 변화들을 요구한다’는 문장이 이 챕터에서 집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나타낸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굵게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장기간의 체계적인 변화들에 대해 더 논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을 던져봅니다. 퀴어뿐만 아니라 망명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서, 개인적으로 느껴봤던 소수자성이 있는지 역시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어요.
HB: 이 부분을 읽으면서 퀴어를 포함한 개인의 정체성을 우리가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에서 퀴어와 장애 관련 행사를 언급하면서 경제적인 요소와 작가 개인의 계급적인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저희 역시 이 점을 고려하면 좋겠다는 생각. 저는 ‘사적인 피난처’를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적인 것을 넘어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인상이 깊어요.
YG: 단순한 존중이나 정체성의 인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퀴어 정체성이라는 게 최근 들어오면서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 것 같거든요. 故 변희수 하사 같은 경우도 보면 군대라는 조직과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양립하기 어렵듯이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HG: 100쪽의 '퀴어 정체성은 상실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장과 겉으로 (퀴어)정체성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겉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냐로 일상의 많은 것들이 갈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 개인의 성지향성으로 인해 개인을 향한 시선이나 태도, 행동 등이 바뀐다는 것인데, 이는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회구조의 허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또한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은 퀴어의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해서 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모든 퀴어가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고 또 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조하도록 강제할 권리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퀴어 정체성을 관념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나름의 맥락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YG: 외국에 나가 결혼한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퀴어 활동가로서의 이미지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상에서는 결혼, 예식장 예약, 웨딩드레스 고르기 등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를 다루더라고요. 퀴어를 포함한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인데, 우리가 원하는 인권친화적인 혹은 활동가적인 이미지를 투영해서 정체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지, 이런 인식이 그들을 옥죄지는 않을지 생각도 들었습니다.
HB: 퀴어 혹은 소수자의 계급 문제와 일반적인 계급 문제를 다르게 생각해야 할까요? 책에서 경제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수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퀴어와 사회 전체의 경제 불평등의 문제가 다르게 다루어져야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YG: 특히나 퀴어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제 불평등의 문제가 극심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문제를 다르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포용력 있는 사회 분위기 촉구 같은 추상적 차원의 이야기보다는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HB: 질문을 조금 바꿔서 앞서 필요하다고 언급했던 '장기적이고 가시적이고 체계적인 변화'에 경제적 불평등 해결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YG: 저자는 백인 하층 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의 서울-지방 차이보다 저자가 느낀 계급적 차이가 더욱 명백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H: ‘퀴어 정체성은 상실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장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책에서 근거를 찾아보았는데, 91쪽에 ‘나는 내가 퀴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균형을 점검하고 안전을 경계 짓는 보이지 않는 선을 재면서 맘 편히 살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모든 개인은 여러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상실을 퀴어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책에서 언급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20년 전인 1999년에 초판된 상황을 고려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YG: 이 책이 20년 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오히려 잘 드러내는 것 같아요. 교차적인 정체성이 맥락 중심적인 이야기이다 보니 20년 전의 상황과 지금까지의 변화에 대해 맥락 중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반영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H: 1부에 언급되는 '집'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요.
HB: 250쪽에 '나는 어딘가에 속하길 원했다.'는 문장을 보고 집이 돌아가고 싶은 곳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어요. 전 이전엔 개개인이 가진 고유한 개별성을 그저 그대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저자는 집단에 속하길 원하고 공유된 감정을 느끼길 원했다는 점에서 새로웠거든요.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이 나의 개별성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어요.
YG: 책을 읽으며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랐어요. 고향이 부산인데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책에 언급된 '집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에 많이 공감했거든요. 부산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살던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 컸어서. 소속감도 가능하겠지만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 역시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자가 언급하는 '상실'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뿌리와 연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HG: 내가 느끼는 바, 내가 생각하는 바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YG: 저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동시에 집이라는 공간이 저자에게 얼마나 차별적이었는지도 동시에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상 저자가 그리워하고 있던 것도 물리적인 집뿐만 아니라 나다움을 오롯이 인정받고 싶지만 쉽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상실감이 응축된 것 같아요. (집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공간이지만 막상 돌아간다면 나다움을 오롯이 인정받기도 또 스스로도 인정하기 힘들어지는 곳. 그런 점에서 앞으로 지향하고 싶은 세상을 집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해요.
HB: 1부 마지막 문장이 '나는 나무로 둘러싸인, 내가 여전히 집이라 부르는 언덕과 마을에서 혁명이 일어나길 원한다.'인 걸로 보아, '집'이 이상적인 상태로 만들고 싶어 하는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HG: 애증의 공간...
[2부 몸 - 주머니 속의 돌, 심장 속의 돌]
YG: 이 챕터에서 258쪽과 278쪽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이들은 여성으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남성으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어.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존재할 새로운 길을 내고 있어. 너희에겐 우릴 부를 대명사조차 없잖아.'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자....... 우리 몸을 되찾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한 무모하고 대담한 이야기를 나누자.' 이 부분이 우리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담론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서 너무 좋았어요.
HG: 260쪽과 264쪽에 아동학대와 관련된 부분, 그리고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그 이면에 거시적인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담긴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사람 대 사람의 미시적인 대화와 삶에 집중하는 것이 결국은 거시적인 구조에 기여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YG: 책의 교차성 담론은 담론장 안에서의 역할로 충분한 것일지 혹은 어떠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HB: 교차 정체성은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각자가 가진 정체성의 요소가 모두 다르고 그것이 교차하는 지점에 정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저자는 연대와 같은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연대와 같은 행동은 공유된 생각을 바탕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가능한 것인데 교차 정체성을 바탕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요. 그 모든 다름을 아우르는 공유된 방향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은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YG: 당사자 행동주의와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요. 다양성 담론이 어느 순간부터는 당사자성이라는 근거를 넘어서 소수자성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다수의 절대적인 공감을 바라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HB: 그러면 당사자성을 넘어서는 행동의 동기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보통 옳다고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행동을 촉구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그 행동이 옳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다시 말해 공공이 말하는 올바름에 대한 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확신을 가지게 되었나?
YG: 나 역시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는데 이러한 잠재적 당사자성을 제외하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설득했다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를 직면하게 된 경우에 교차성 담론을 적용해보았을 때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설득의 논리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