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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Jan 30. 2023

손절의 기준

읽씹 두 번

1여 년 전쯤.

꽤나 민망한 상황인 중 실수로 걸린 전화를 해명하느라 보낸 문자를 읽씹 당한 적이 있었다. 평소 좋게 생각했던 친분이 있어서인지 이해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했던 그 실수가 처참히 민망하여, 괜찮으니 맘 편히 가지라는 문자 정도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한 번이 없었다. 그때의 읽씹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나만 좋았고 소중했던 인간관계였구나 싶어 기억을 지워가고 있었다.


한 1년 후 모임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 사람은 내게 매우 화가 난 듯 보였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내게 손절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당시 내 연락을 읽씹 한 이는 그쪽이었는데도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하고 오는 듯한 묘한 그림이 그려졌다.

어쨌든 그렇게 내게 화가 났을 정도면 오히려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해를 풀기 위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잘 읽었느니 어떻다느니 답이 없다.


이 정도면 대놓고 내가 별 의미  없으니 꺼지란 뜻 아닐까? 그래서 꺼지려는데 오랜만에 들어간 유튜브에 그 사람 채널의 영상이 알고리즘으로 뜬다. 꺼지려 했지만 영상이 너무 좋길래 댓글을 달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게 유튜브 댓글에는 너무나 친절하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유튜브댓글로 소통을 하면서 난 또 그게 본모습이라 생각하며 서운한 맘을 털어냈다. 그러다가 다른 이유로 댓글을 달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댓글은 못 달지만 앞으로 애청할 테니 응원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또 읽씹이다.


대면할 때, 개인적 연락할 때, sns에서 볼 때. 다 다른 사람 같다.

나는 내 인간관계에서 읽씹을 당한 적도 없으나, 내 기준에서 읽씹은 손절의 기준이 된다. 한 번은 사정상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읽씹 두 번이라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별로 의미 없는 사람이란 뜻이므로 내게 이건 손절의 기준이다. 내가 1년 전 그 사람을 정리했던 근거가 바로 이 읽씹이 두 번을 넘었기 때문이다.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난 잘못한 것도 없이 그 사람에게 사과했고, 또 읽씹을 두 번 당했다. 그럼 이 인간관계는 손절이 확실한 것이다. 이미 내가 읽씹을 통해 손절당해 놓고서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중인격자인가? 내가 어떤 이유로 싫었으니 읽씹을 한 거다. 어쩔 수 없이 만난 자리에서는 싫은 맘을 화를 내며 표현한 거다. 따라서 그 사람이 내게 화를 내며 나를 몰아붙이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sns 댓글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했기에 싫은 나라도 댓글을 달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보같이 내가 사과하고 있고 더 바보같이 내가 연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난 무시당했다.


읽씹이란 손절의사이다.

읽씹은 손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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