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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린 Feb 04. 2022

떡국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힘 좀 써봐.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by 캐서린 메이

 드디어 28살이다. 남들은 20대 후반이 주는 우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하는 나이지만, 나는 올 설에 떡국을 두 그릇이나 퍼먹었다. 아주 전투적으로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그 이유는 지긋지긋한 초년의 불운이 사라지는 나이라고 몇 해 전 사주를 보러 간 선생님께서 짚어주신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20대 내내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건조하게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2020년 팬데믹 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영미권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라고 안내된 것과 달리 나에게는 그다지 크게 와닿지 못했다. 그저 버티는 시기에는 글 같은 게 읽히지 않는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더욱 부정적인 생각에 갇히거나, 그저 침잠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작가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진정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다. 아니 여유가 없었달까. 작가는 남편의 복막염, 1년이나 앓고 있던 대장암, 자신 커리어의 중단, 자식의 등교 거부 등의 연이은 불운에 본인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몸도, 마음도 힘든 시기를 겪으며 한 번 더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왜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와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기란 어색하고 불안한 감정이기는 하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 작가와 같이 여러 불행이 겹친 이 상황에서까지도 직장에 폐를 줄까 걱정해야 한다니.(물론 무슨 느낌인지는 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인생의 암흑기이자 ‘걱정 마, 곧 봄은 찾아올 거야’하며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인가가 글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이었다. 나의 내밀한 아픔을 내보이는 이런 책에서까지 성찰과 문제의 해결, 희망을 선보여야 하다니. 여기서까지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첫 단락부터 짐작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 아팠고 아픈 상태다. 마음의 감기는 개뿔. 뇌라는 기관에 4기 정도의 중증 암이 생긴 것과 같은 느낌을 꽤 오랜 시간 앓고 있다. 25살이 되던 연초, 나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역술가를 찾아갔다. 나름 정치인도 많이 찾아오는 이름난 분이셨다. 독실한 무신론자인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흥 내 인생에 대해 얼마나 맞추는지 보자’와 같은 고압적인 자세부터 버려야 함을 알았다. 상담의 요는 다 필요 없고 28살까지 버텨보란다. 그때부터 인생이 술술 풀린다나.



 1시간이 후딱 가고 눈물을 펑펑 흘린 어린 손님을 배웅해주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남들보다 인생의 겨울이 일찍 왔으니, 이걸 잘 이겨내면 세상에 대한 눈이 빨리 떠질 거야. 이게 동력이 되어 또 다른 겨울이 닥쳤을 때 짧게 앓고 지나갈 수 있겠지.”



  그날 밤 내가 들었던 감정은 감사함과 기대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 터널에 누군가 종말을 고해준 느낌이었고 (3년이나 남았지만), 내 힘듦이 내 탓이 아니다라는 작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에잇. 그래. 내일 당장 코 박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날인데, 후회하지 않도록 내 맘대로 해보자.



 


행복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다. 아마도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혹은 힘든 일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슬픔을 무시해야 한다고, 책가방 속에 슬픔을 쑤셔 박아놓고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때때로 그 또렷한 외침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윈터링이다. 슬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그것은 슬픔을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의 요소로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의 경험 중 최악의 경험을 응시하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치유하고자 애쓰는 용기다. 윈터링은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칼날처럼 첨예하게 느끼는, 직관의 순간이다. (p 165-166)



 

 슬픔과 우울은 한동안 없는 것처럼 책가방에 쑤셔 넣을 수 있지만, 그 부피가 끝도 없이 커지게 될 때는 성숙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해답일 수도 있다. 내가 이해한 겨울나기는 바깥에서 답을 찾기보다 슬픔과 우울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꺼내는 일이었다. 얼어붙을 것을 알지만 피하지 않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어쩌면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자연치유를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회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서는 일. 우울 에피소드는 종 모양의 정규분포표처럼 생겼기에,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내가 할 일은 두 눈 꼭 감고 지표면으로 안전하게 착륙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듣기 싫었던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정신의학과에서는 항상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고점이 어느 때보다 높아도, 이번 에피소드는 유난히 길어도, 나는 직면했고 견뎠고 되돌아보면 소소히 승리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두서없어지고 있다. 28살, 인생에 햇빛이 비출 해라던 그 나이. 너무 많은 기대는 안 하려 한다. 단지 나 자신이 편안함에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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