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착실히 한 해 한 해 단계를 거쳐 보통의 어린이처럼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명절 때마다 뵈었는데, 볼 때마다 지겹도록 똑같은 소리였다. "많이 컸네." 난 내 나이에 맞게 건실히 차곡차곡 자라왔을 뿐인데 많이 자란 건 또 뭔가. 당시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 마음관 다르게 몸은 느려 터졌던 걸. 키 번호도 몇 년간 3번에 머무르던 나는 나만 천천히 느리게 크는 거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육아 프로그램 속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그 어르신들보다 댓 배는 놀라며 "많이(빨리) 컸네!" 하고 말하게 되었다. 그제야 알았지 나도 이 말을 하게 되리라는 걸.
초등학생 땐 부모님을 동반하지 않아도 15세 영화를 볼 수 있는 중학생이 부러웠고 중학생 때는 혼자 콘서트도 다닐 수 있는 고등학생이 부러웠고 고등학생 때는 혼자 밖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대학생이 부러웠다. 나이에 얽매인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걸 즐기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될 나이라는 생각으로 미래에 기대만 한아름이었지 딱히 박탈감이라거나 할 것 까진 없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영화관, 놀이공원, 술집 등에서 따지는 나이 제한이라는 제도적 차원의 법규와 규율에 노출되어온 덕으로 자연스레 나이에 따른 합당한, 합법적인, 규칙에 준하는 행위로 정해진 것만, '나이에 맞는 것만' 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혔던 듯싶다. 어떤 건 너무 어려서 안되고, 어떤 건 너무 나이 들어서 안되고. 스무 살 때까지 모든 건 적당한 나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적당함의 기준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로 남들의 말에 언제가 적당할지 휘둘리며 살았으니 정확히는 내 주관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열여덟이 가장 좋은 것 같았다. 그 정도 되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니 그 나이론 혼자 세상살이 하기 여간 쉽지 않았을 나이이긴 하다. 딱 어른과 아이 그 중간에서 아이로서의 동심이라는 책임도 어른으로서의 막중한 현실의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딱 그런 명랑한 나이처럼 느껴졌다. 술이나 담배는 나이가 차더라도 어차피 하고 싶지도 않고 못할 테니 영원히 2-9 청춘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흐를 뿐인 시간이 야속했다. 내 맘대로 멈췄다 흐르게 할 수도 없는 시간인 주제에 단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전가하다니. 아무것도 안 알려주면서 세상은 자기들의 체계대로 흘러간다. 그렇기에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첫 발을 내디뎌야 하는 시련을 태어나 처음 마주한 아이처럼 어떻게든 잘 돌아가는 세상 위로 탑승해야 한다. 혹여나 첫걸음부터 미끄러지지 않을까 내가 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탑승하지 않는단 선택지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의지가 있는 한 없었다. 어쩌면 세상이 겁도 없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열여덟 나라면 2년이 지난다고 달리 크게 다른 '큰'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런 나에게 그런 자격을 주는 거지. 내가 그럴 자격이 되나? 싶었다.
졸업을 하고, 갑자기 성인이라는 책임을 지려니 너무도 무거운 감투가 앞으로 턱 굴러왔고 그 앞에 괴어 앉은 채 시험도 보지 않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받드는 기분이었다.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신나긴 했다. 한 거 없이 누릴 수 있는 게 생길 테니. 대신에 감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별 수없이 감투를 받아 들고 지내다 보니 다들 준비가 되어서 어른이 된 건 아니구나, 그리고 지금의 나이도 당연히 청춘이구나 싶었다. 오히려 그때 열여덟에서 정말 내 나이가 멈췄더라면 나 스스로가 만든 세상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시간이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고마운 일이다.
학교 밖에선 쟤와 나를 비교할 계측 수단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성적 하나만으로 위아래가 나뉘는 기분은 썩 좋지 않다. 특히 위가 아니라면 더더욱. 번듯하게 깔린 아스팔트 위를 모두가 같이 딛다가(학창 시절) 중간에 어떤 길로든 새더라도 그곳이 실수로 삐져나온 엇된 길이 아니라 어엿한 갈래길 중 하나임을 인정할 수 있을 때(졸업 후)부터 새로운 도전을 하기 쉬워졌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그때서야 체감했다. 그렇게 새 갈래길로 도전하면서 나아간 내가 있고 계속 도전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고 또 도전할 미래의 내가 기대된다. 이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나의 첫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