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태블릿 사이의 작은 고민

왜 나는 종이 앞에서 더 깊이 몰입하는가

by 김동린

요즘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마주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종이로 된 책을 고르고 만지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책 표지 사진만 찍고 전자책으로 사서 읽는 사람들. 물론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어느 순간부터 종이책과 태블릿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선택이 단순히 종이냐 전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를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학술 자료들을 찾아보며, 이 작은 고민이 사실은 교육과 학습 방식을 둘러싼 꽤나 진지한 연구 주제였음을 알게 됐다.


우선 독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종이 책이 가진 힘은 예상보다 컸다. 많은 연구들이 디지털 화면에서 읽을 때는 이해력이 낮아지는 ’스크린 열등성(screen inferiority)’을 지적하고 있었다. 특히 긴 글이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설명문을 읽을 때, 화면 위에서는 훑어 읽기(skimming)를 하게 되고 정보처리가 얕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 역시 긴 문서를 태블릿으로 읽으면 머릿속에 텍스트가 금방 증발하는 경험을 하곤 했다. 이럴 때마다 종이의 공간적 특성—책장을 넘기고 물리적 위치를 기억하는 그 직관적인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반면, 태블릿의 장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빠른 정보 검색과 효율적인 자료 관리, 그리고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통한 생생한 정보 표현은 분명 디지털의 독보적인 장점이다. 얼마 전 부산 친구의 회사에 방문했을 때도 이 점을 다시 느꼈다. 신발 제조 산업 현장에서 내가 알고 있는 AI 기술을 접목하려니, 자료를 빠르게 찾아보고, 아이디어를 그림과 동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태블릿의 장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문제 해결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출 과정에서는 태블릿의 역량이 충분히 빛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필기 방식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는 점이다. 손으로 직접 필기할 때의 깊은 이해와 기억 효과는 이미 익히 알려져 있고, 많은 연구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나 역시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쓸 때, 더 잘 이해하고 오래 기억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한동안 태블릿 펜에도 기대를 걸어봤다. 디지털의 편리함과 손 필기의 장점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면 이상적일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그 이질감이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화면 위에 글씨를 쓰는 건 생각보다 어색했고, 손끝에 닿는 감각이나 필기 흐름도 종이 위에서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글을 쓸 때마다 미세한 운동 제어가 더 필요했고, 필기 자체보다 ‘제대로 쓰고 있는지’에 신경이 쓰이는 이상한 상황이 반복됐다.


실제로 연구 결과들도 이와 비슷한 점을 시사한다. 디지털 펜 사용에 익숙한 학습자들은 종이 필기와 비슷한 수준의 학습 효과를 얻지만, 익숙하지 않은 경우에는 오히려 타이핑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분석이 있었다. 심지어 태블릿 필기가 종이 필기보다 뇌 활동을 더 많이 유발하긴 했지만, 이해도나 기억력에서는 그만큼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연구자들은 이걸 태블릿 필기 자체가 쓰기보다 조작에 더 많은 인지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결국 디지털 펜의 잠재력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실제 학습 효과로 이어지려면 기기 자체에 충분히 익숙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내게는 아직 그 ‘익숙함’이 부족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이 있는 사고나 창의적인 정리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종이 노트를 찾게 된다. 이건 아직도 내가 화면보다 종이에 더 편안하게 머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싶다.


디지털 환경의 가장 큰 함정은 역시 집중력이다. 알림 하나에 집중이 깨지고, SNS 앱으로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경험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태블릿으로 학습을 할 때면, 늘 자기통제력이라는 큰 허들을 넘어서야 한다. 반면, 종이 책이나 공책 위에서는 그런 함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깊은 몰입과 집중이 필요할 때는 여전히 종이의 힘을 빌리고 있다.


인지부하(cognitive load)라는 개념은 내가 학습 도구를 선택할 때 느꼈던 막연한 불편함이 사실 정신적 자원의 한계와 연관되어있다고 얘기한다. 인간의 작업 기억은 처리 용량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학습 중 불필요한 정보나 복잡한 인터페이스는 그 자체로 집중력을 갉아먹는 부담이 된다는데,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특히 자주 발생한다.


태블릿 사용이 늘어나면서 화면을 스크롤하고 정보를 배치하는 방식에서 오는 작은 피로감과 혼란이 실제로는 내 작업 기억을 소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줄이려면 단순히 기능이 많은 기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과 학습 흐름이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즉 '생각이 걸리지 않는 학습 환경'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도 새롭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단지 디지털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매체가 유발할 수 있는 인지적 부담까지 고려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상황에 딱 맞는 한 가지 학습 방식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목적과 상황에서 무엇을 배우느냐이다. 복잡한 개념이나 깊은 독해가 필요한 내용은 종이를 통해 배우고, 실시간 정보 검색이나 협업, 문제 해결이 필요한 순간엔 태블릿을 사용하면 된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섞어 쓰는 혼합 학습(blended learning) 방식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돌아봤을 때 어떤 기기가 더 좋냐는 단순한 비교보다는, 그 기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이해’와 ‘습관’이 더 큰 차이를 만든다. 새로운 도구가 주는 가능성은 분명 크지만, 그것이 학습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선 그만큼의 시간과 연습, 그리고 교육이 함께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종이냐 태블릿이냐, 하나만 고르라는 이분법적인 질문보다는, 각 매체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내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더 잘 배우는지 스스로 체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건 단순히 학습 도구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나다운 배움의 방식’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가 디지털 시대에 진짜 길러야 할 역량은, 넘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판단하는 감각, 그리고 필요한 때 적절한 도구를 꺼내어 쓸 수 있는 균형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균형 감각이 결국, 조금 더 지혜롭게 배우고 성장하는 우리의 방향을 정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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