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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l 14. 2024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는 말.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78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제 자신을 믿어야겠어요!"


아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놀라고 어이없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해프닝이라고 할 만한 사건을 설명했다.


7월 첫 주, 중학생이 되어 진단평가라는 이름으로 기말고사를 봤다. 한 달 정도의 준비기간과 이틀간의 시험기간을 거치는 동안 본인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를 바랐다. 부모로서 하고 싶은 말도, 개입하고 싶은 때도 많았지만 코칭이라는 이름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길래, 알아서 한다고 말하는 아들을 존중하려 애쓰면서 관찰자로 남아 있었다.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지?' 등등 시험준비라는 행위에도 나름 방식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눈에 보이는 아들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영어는 자신 있게 볼 줄 알았다. 학원에서 내신대비를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속된 말로 돈 값은 하나 싶었다. 스스로 안 하는 아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보였다. 교과서 본문을 외우게 시키는 것은 기본이요, 기출문제와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풀게 했다. 30여 년 전, 호랑이 담배 피울 적 같은 시절, 나도 교과서를 외우듯 반복적으로 읽고 문제집을 풀며 시험에 대비했다. 그때는 혼자서 공부했다.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영어는 혼자서 공부하던 학생이 대다수였다. 물론 지금도 혼자 공부하거나 엄마가 봐주는 공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이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학원으로 간다. 


아들은 교과서를 외우고 시험을 봤더니 문제가 쉬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중학교 1학년 영어가 얼마나 어렵겠냐 싶거니와 공부를 했으니 무난할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도 1-2개는 실수로 틀렸다는 말에 "그래, 첫 시험 보느라 수고했다"라고 하며 시험얘기는 멈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성적이 나왔다는 얘기가 들려 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50점대가 나왔다는 말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뭐라고?!"

"밀려 쓴 거 같아요."

그게 다였다. 큰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탄스럽게 입 밖으로 나와버린 세 마디. 나도 아들도 남편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아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내내 아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답안지를 밀려 쓰는 학생이 우리 집에도 있네."

"차라리 잘됐어. 성적에 들어가는 2학기 시험 전에 연습 삼아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릴 거야. 

"다시 가르쳐 줘야겠어."

등등...

그날밤 남편과 한참을 얘기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기분이 약간 풀렸는지 아들은 유로 2024 얘기를 잠깐 하다 등교했다. 새벽에 출근한 남편도 아들이 궁금했는지 카톡으로 아들의 기분을 물을 정도였다. 오후 늦게 하교한 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엄마, 영어성적말이에요. 선생님이 실수하신 거래요! 전교에서 우리 반 답안지만 밀려 입력하셨대요!"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알았어?"

"우리 반 여자아이들이 자기 성적이 너무 믿기지 않아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해서 밝혀졌대요."

"여자 친구들 덕분에 사건이 해결되었구나! 다행이야! 그 친구들 아니었으면 내내 찜찜하고 억울했을 텐데."

"전, 선생님들은 실수 안 하시는 줄 알았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점수가 확 낮아졌는데도, 제가 잘못해서 점수가 안 나온 줄 알았어요. 앞으로는 저만 믿어야겠어요. 점수가 높게 나왔던 아이들은 원래대로 낮게 되고, 저같이 낮게 나온 애들은 다시 높아졌어요."

"무조건 타인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만 믿을 수도 없는 게 살면서 엄마가 느낀 거야. 그럼에도 자신을 먼저 알고 믿는 게 중요해. 큰 경험 했어. 잊지 못할 첫 시험이야."


그렇게 기분이 풀린 아들은 퇴근한 아빠를 보자 다시 한번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왜, 우리는 아들이 밀려 썼을 거라는 말에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우리 부부 또한 아들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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