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힙하네. 젊은애들처럼 통 넓은 바지 입고 모자 쓰고.
제가요?
뜻밖이었다. 힙하단 말을 나 같은 사람한테도 쓴다는 게.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딴 세상 언어인 줄 알고 살았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내 스타일을 평가했고 얼떨결에 점수를 받았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님 반성을 해야 하나?
말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음이 결정된다. 가볍게 피식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칼로 베인 듯 흉터를 남기는 무거운 것까지 폭과 깊이가 다양해서 자로 재듯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말은 힘이 세다. 어렵다. 무턱대고 내뱉지 말고, 생각해서 입 밖으로 신중하게 표현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듣게 되는 단어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자니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갈 수도,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니 어느 정도의 타협도 중요하다. 특히 겉모습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 안 하는 편이 낫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에게나 해당되는 말인 걸로 치부했던 내가 색안경을 낀 사람이었나? 대세가 "힙(Hip)"인지 사람, 장소, 유행에 두루두루 쓰인다. 외모, 소신 발언, 행동으로 개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멋있다고 묘사하는 말로 쓰이는 듯하다.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독서하는 행위를 멋지게 보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MZ세대 연예인들의 독서 인증으로 시작된 텍스트힙 열풍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더욱 거세졌다.
애들처럼 대충 입고 다닌다? 자유롭게 개성 있게 입어 멋있다? "아"다르고 "어"다른데... 어떤 뜻으로 말을 했을지 잠시 생각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나를 살펴봤다. 40대 후반을 향해가는 내가 통 넓은 바지에 모자를 쓴 게 힙한 스타일이라고? 젊잖게 블랙으로 멋스럽게 입고, 로퍼에, 브랜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무척이나 대조적이게 보였나 보다. 캐주얼한 걸 좋아하는 것뿐인데 의도치 않게 그리 보였나 싶다.
아프기 전과 후로 바뀌었다. 편한 게 최우선이 되었다. 타이트한 바지는 혈액순환이 잘 안돼 답답할뿐더러 마른 다리가 도드라져서 자연스레 피하게 되었다. 모자는 머리숱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쓰게 되어 이제는 별의식하지 않고 착용한다. 마침 헐렁이 패션과 사계절 내내 모자 착용이 어색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기에 크게 튀지 않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참이었다. "자유롭게, 편하게 살자"는 내 모토처럼 살다 보니 개성 있는 사람으로 재탄생한 듯하다.
OO엄마가 나보고 힙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별생각 없어.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쓰지. 그냥 내 스타일대로 살긴 하는데 자꾸 생각나네.
남편에게 슬쩍 이야기해 봐도 크게 반응이 없다. 어차피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상황에 맞춰 살게 된 나다움이 어쩌다가 트렌드에 맞으니 무채색의 개성 없는 내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힙하다고 들으니 웃겼다. 다시 보니 힙스타일에 텍스트힙까지 결합된 힙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학창 시절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아이에서 암 덕분에 개성 있는 아줌마가 된 기분이다. 인생은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도 쭉 나만의 색깔로 겉과 안을 채우는 인생을 살고 싶다.
힙하다: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
<네이버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