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눈망울로 딸아이는 자주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매일 보는 엄마인데, 애교 없는 엄마라 재미가 없을 텐데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쉽다고 자주 들먹인다. 남편한테서도 듣지 못한 이런 달달한 애정 표현을 듣고 살게 되다니... 참 복도 많은 엄마이다. 보통 남편과 아들, 나 이렇게 셋만 집에 있으면 집안이 절간 같다. 딸이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치 빗방울이 "뚝"하고 떨어지며 사방으로 잔잔하게 퍼지는 호수처럼 변한다.
1년에 한 번 이맘때쯤 서울대병원에 검진하러 간다. 비록 병원행이지만, 딸은 좋아한다. 학교를 조퇴하고 둘이서 오후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병이 있어 다니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가볍다.
울산에서 처음 진단을 받았다. 다리길이가 다르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견에 당황스럽고 눈앞이 깜깜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노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결과에 답답했다. 다리가 찌릿찌릿하다는 말에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1센티 미만의 차이로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고 겉으로도 티는 안 났지만 계속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성장기라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깔창을 넣은 신발을 신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1년을 불편하게 지내다 울산에서 용인으로 돌아온 후 서울대병원 진료를 시작했다. 여기서는 깔창도 필요 없이 추적 관찰만 하는 수준이다. 눈에 띄는 변화 없이 자라고 있어 일단 걱정은 내려놓았다.
가을 소풍 오듯, 우리 모녀는 마로니에 공원 건너로 나들이를 온다.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풍경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손을 꼭 잡고 서로를 챙긴다. 연인처럼, 둘만 바라보며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하다. 둘이 외출할 때 느껴지는 엄마의 보살핌과 애정을 온몸으로 즐기는 듯하다. 둘이 나올 때야 비로소 나도 딸만 바라볼 수 있다. 곁에 있지만 온전히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아직은 모르기에 가족과 함께 보다는 단둘이 외출하기를 언제부턴가 학수고대하는 눈치다. 집으로 향하기 전 진료를 마치고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달달한 던킨 도너츠 한 입 베어 물고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 어여쁜 얼굴을 한동안 쳐다봤다. 항상 "나만 봐주세요"라고 시시때때로 추파를 던지는데 받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청명한 가을 풍경의 일부가 된 딸을 바라보며 딸이 곁에 있어 감사했다. 때론 다른 기질 탓에 맞춰주기 힘들다고 푸념도 하지만 표현에 능하고 활발한 성격덕에 내 부족한 면을 배우고 채우며 살아가는 힘이 된다.
둘째를 낳을까 고민하던 때가 떠올랐다. 친정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어 아들 하나만 키우기도 버거웠기에 둘은 엄두가 안 났다. 낳게 된다면 아들 하나 있으니 욕심부려 이왕이면 둘째는 딸을 낳고 싶었다. 결국 성별에 상관없이 둘은 낳자는 남편의 말에 항복하고 낳았는데 살면서 계속 깨닫는다. "낳길 잘했다"라고. 이런 뮤즈 같은 딸을 옆에 두게 되었다. 앞으로도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잘 살고 싶다. 다음에는 진짜 소풍을 가자고 입을 맞추고 발을 맞춰 걸어갔다. "엄마는 내 거"라는 말이 오래오래 유효하도록 서로 노력하자고 두 손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