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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영 Sep 11. 2024

국가정책은 반드시 국익을 전제해야 한다.

민주주의 숙명 같은 부작용 포퓰리즘

1)


정부의 갑작스러운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하여 대다수 전공의가 수련병원을 떠나고 몇몇 의대 교수들까지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러 한국은 일찍이 없었던 의료대란에 직면해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이 한국 의사 평균 연봉이 OECD 국가 중에 1위인 2억 6천만 원에 달하여 일반사람의 6.7배나 된다는 진위를 알 수 없는 통계를 기정사실처럼 부각하고 있는 반면, 전공의가 조선족 간병인 보다 적은 월급으로 하루 10시간 이상 온갖 일을 하고 있음은 감추고 있다. 전공의가 사직하는 것을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밥그릇을 지키려는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정부는 행정명령을 남발하여 전공의의 의사면허를 정지하겠다고 으름장 놓아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윤 정부가 갑자기 의대 정원을 파격적으로 늘리는 정책을 발표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로 의사가 부족해서일까? 갑자기 70% 의대생을 증원하면 양질의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 의사수의 갑작스러운 증가로 의료비 증가와 현대의학의 가장 큰 단점과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업화와 지나친 세분화가 더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국민에 해가 됨을 몰라서일까? 의사 수만 늘리면 필수 의료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혹자는 의사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2의 코로나 판데믹이 미래에 닥치면 의사가 부족할 것이라고. 그러나 판데믹을 겪으며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고대부터 여러 차례 있었던 판데믹처럼 현대의 판데믹도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확진자들은 전부 격리되었고 사람들은 개인의원에 감염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판데믹 동안에 가장 바빠야 할 의사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한가한 시절을 보냈다. 일부 병원의 의료진이 탈진하여 쓰러지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그것은 의사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코로나의 위험성이 너무나 과장되어 과도한 PCR검사와 과도한 방역을 한 것과 대형병원위주로 선정된 코로나 거점 병원에 환자가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노령인구가 증가하여 의사수가 부족할 것이라 주장하지만, 노령 환자의 대부분은 만성질환자로 의사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의대 정원을 늘릴 수밖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 25년~27년 사이 완공되는 합계 6600 병상 규모의 수도권 대형병원 분원에서 최소 2000명의 의사가 필요하며, 둘째 인구 감소로 인해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므로 건강보험을 축소하고 민간보험을 도입하고 영리 병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서며, 셋째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만들어 의사가 청진기 대신 헤드폰과 마이크를 착용하고 모니터를 보며 진료하여 처방한 약을 택배로 보내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개원의와 지방 중소병원은 초토화될 것이고, 환자는 더욱 수도권에 집중될 것이다. 의료는 더욱 상업화, 비인간화될 것이며, 국민이 지출하는 의료비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2)

국가 정책이란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 국가 수호라는 절대적인 조건 다시 말해 ‘국익’을 전제해야 한다. 국익이 없는 정책은 독단과 독재며 이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일이다. 그러나 현재 세계 도처에서 국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 있는 정책을 그 반대로 선전하여 선거에서 이기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이 포퓰리즘은 1당 독재하는 공산국가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선거에 의해 권력 향방이 달라지는 민주국가에서만 벌어지는 정치 형태로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숙명 같은 부작용이다.


미국의 조지타운대 역사학자 마이클 카지노 교수는《포퓰리스트의 설득: 미국사》에 이렇게 썼다. “포퓰리즘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 사람들이란 보통의 사람들을 계급으로 협소하게 구분하지 않고 고귀한 집합체로 여긴다. 또한 자신들과 대립하는 엘리트(최상류 층)를 자기 잇속만 차리며, 비민주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그 엘리트에 대항하도록 결집시키고자 한다.”


포퓰리즘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포퓰리스트다. 정치학자들은 포퓰리스트를 좌우로 나누는데, 보통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우파 포퓰리스트'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버니 샌더스 같은 이를 '좌파 포퓰리스트'로 구분한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치고,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의 적이라 했던 우파 대통령 윤석렬이 현재 의대 정원의 70%인 2000명을 갑자기 증원을 하려는 것은 의사들이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시위를 하도록 유도하여 국민과 의사 엘리트 집단을 갈라 쳐 특히 정치적으로 변덕스러운 집단인 중산층의 결집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현재 한국의 의사는 문재인 정권에서의 적폐와 동급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은 좌파 포퓰리즘으로 병들어 왔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무상 대학교육, 높은 최저임금, 기본소득 지급 등을 주장하면서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대학생, 빈곤층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의약분업에서 시작하여 문재인 케어까지 건강보험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였지만, 국민들이 내야 하는 건보료가 증가한다는 사실은 감추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은 한국에서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하는 복지 재원을 마련할 방법은 오직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 말고는 없었다. 복지는 약간 좋아졌지만, 세금은 더욱 많아졌다. 임대료와 집값이 폭등하였다. 포퓰리즘의 성공으로 선거에서 이긴 정치인과 노조들의 좌파 이권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고, 전반적 국민의 삶은 나빠져서 한국은 가장 우울한 국가로 세계에 알려졌으며,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새로운 형태의 홀로코스트가 진행 중에 있다.


존 B쥬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포퓰리스트 운동은 종종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의 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포퓰리스트 운동이 제기하는 요구는 주요 정당에 흡수되거나, 철저히 외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퓰리스트는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들의 등장은 지배적인 정치 이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하다는 신호이자, 표준적인 세계관이 고장 났다는 신호다. “


좌파 포퓰리즘에 더해 우파 포퓰리즘까지 나와 국민을 현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나라와 국민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권력이 위태롭거나,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이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정치 이념이 정치권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


개인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포퓰리즘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냐마는 현혹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가져야만 하는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

그것은 의사나, 대통령이나, 선출직 공무원이나, 자영업자나, 거리의 청소부나 모두 똑같은 "직업인"으로서 평등하다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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